요한계시록 강해(9)
라오디게아 교회: 지워버리고 싶은 교회
본문: 계3:14-22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분명 “토하여 내치리라”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상태를 두고 말씀하신 주님의 준엄한 경고입니다. 고대 소아시아 지방의 라오디게아 시에는 아주 유명한 물웅덩이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시를 처음 찾아오는 많은 여행객들이 그 우물물이 구토작용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그 물을 마셨다가 그만 토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라오디게아 시민들이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깔깔대며 웃곤 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약수터에 가 본 기억이 납니다. 아주 맑고 시원해 보이는 물인데 마시고 나면 그 자리에서 금방 토하게 된 기억이 많이 있습니다. 헛구역질을 하는 제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이 막 웃습니다. 사실 좋은 물일수록 알카리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느끼하고 미지근하지요.
“토하여 내치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암시해주는 바가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환경, 도시의 특성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시민들이 이방 여행자들이 그 물을 마시고 토하는 것을 보고 깔깔대며 웃는 라오디게아만의 경험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고, 그것을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에 적용하고 계십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동일한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는 모습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도시의 환경과 주변여건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다. 동일하신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 상태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둘째로,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미지근함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영적 미지근함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특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수들이 그 모습을 보고 깔깔대며 웃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너희의 상태를 원수들이 보고서 얼마나 비웃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구나.”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미지근한 상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가오는 주님의 날을 준비하지 않고 너무나 안이하고 게으르게 하루하루를 대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점점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세속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매사에 있어 군기가 빠진 군사들의 모습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군복을 입었는데 군기가 빠진 군인들만큼 꼴 보기 싫은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신 것은 군복을 입었으면 군기를 확립하고 살 것인지 아니면 군복 자체를 벗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휘관이 군대를 사열할 때 가장 싫어하는 장면이 군기 빠진 ‘당나라’ 군대의 모습을 보일 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인 군기가 없었습니다.
셋째로,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신 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그 사랑하는 교회를 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몸의 한 부분이 심하게 썩어 들어갈 때 과감히 수술하여 도려내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권한도 갖고 계십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15:1,2)
오늘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입니다. 한 가지는, 무엇이 라오디게아 교회로 하여금 주님이 토하여 내고 싶다고 말씀하실 정도의 지경까지 이르게 만들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미지근함을 만들어낸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군인으로 하여금 군기가 빠지도록 했는가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이 원하시는 상태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진단입니다. 어떻게 해서 무엇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와 같이 주님에게 구토증을 가져다 드렸는가?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둘째는 치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미지근함을 치료하는 약은 무엇입니까? 위대한 의사이신 예수님의 처방이 무엇일까요? 진단과 처방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 상태를 주님의 관점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5절부터 17절까지 읽어봅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로 부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니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 말씀 속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미지근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단서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는 차지도 더웁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면 하고 말면 말고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어중간한 태도를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신분에 걸 맞는 태도와 행동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찬 것은 냉냉한 믿음이고, 더운 것은 열렬한 믿음이라 하는 해석입니다. 그것은 감정에 포인트를 둡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은 단지 감정적으로 열렬한 신앙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확실하고 단호한 신앙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청년부가 냉랭하고 침체되어 있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단지 겉으로 나타나는 열정적인 모습이 중요합니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사데교회를 떠올려보십시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가지고 쉽게 판단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삶 속에서 의의 열매들을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생활 속에서 의의 합당한 열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찾고 계십니다. 저는 우리 청년부가 침체되고 냉랭해졌다는 말을 들을 때 어쩌면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됩니다. 참된 인내와 거짓된 위선을 가려줄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분위기가 뜨거워서 ‘뭔가 있는 것’ 같을 때 누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양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바람이 불어야 겨가 날아가고 알곡이 남는 것처럼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분위기와 감정, 모두가 사라져야 참된 알곡이 남게 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감정적으로 열렬하고 뜨거운, 이른바 흥분한 상태, 감정적으로 고양되고 고무된 상태를 요구하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때는 뜨겁게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하는데 세상 속에서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아간다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삶입니다. 우리는 감정이 말하는 것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분명한 태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았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삶의 의지, 이른바 군기를 요구하십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군사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써 죄와 세상과 마귀와 싸워야 할 영적 전장의 한 복판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부름 받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어떤 색깔의 군복을 입고 있는 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놓쳐버리면 군기가 해이해집니다. 결국 삶은 세상의 빛으로 부름 받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맙니다.
교회사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을 동안 초대교회는 순수한 믿음을 유지하면서 계속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여기서 부흥과 성장은 외적인 성장이라기보다도(물론 외적 성장도 포함됩니다)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다운 분명한 태도입장의 변화에서 성장을 말합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부자들이 교회에 기부금을 바치고 땅을 바치고 하니까 교회는 점점 부요하게 되어갑니다. 그러나 교회의 성직자들이 타락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교회라는 영적 흑암기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데 교회다운 교회, 복음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교회는 사라져가고 결국 화려한 건물만 남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좀 더 많은 재산과 부를 축적하려고 시도할수록, 그리고 교회가 재산이 많아져갈수록 영적으로 더욱 곤고해져 갔다는 이야깁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뿐만 아니라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없고, 힘들고, 어려울 때 환난과 핍박이 심할 대, 주님이 주시는 영적 체험도 많습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가 용이해집니다. 그러나 점점 삶이 윤택해지고 안정되어갈수록 영성도 둔탁해져갑니다. 머리는 커지는데 가슴은 미지근해져갑니다. 입술은 그럴듯한데 삶은 세상과 타협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도대체 군기란 사라지고 맙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더 안정되고 더 많이 소유할수록 영적으로 더 빈곤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 때 영적으로 가난해져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지근함의 상태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미지근하다는 말은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은혜를 갈망함이 없으며, 스스로의 제한된 자원에 만족하고 멈추고 만다는 것입니다. 더욱 풍성한 은혜를 갈망할 다른 이유를 도무지 발견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원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교회였습니다. 부자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시험이나 환난이나 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라오디게아시 전체가 부자도시였습니다. 이 라오디게아 도시는 의류업과 금융업과 약물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최신유행의 옷이 생산되었고, 소아시아의 최신 유행을 선도하였습니다. 도시 전체에 돈이 많았습니다. 의료산업도 발달해서 요즘말로 의과대학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눈에 바르는 연고가 가장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한때 큰 지진이 이 도시 전체를 휩쓸고 지나가서 도시를 사정없이 붕괴시켰지만 빌라델비아 도시와 달리 로마시의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도시를 자체적인 힘으로 복구하였다고 역사가가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야말로 부자동네에 부자들만 다니는 부자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 때문에 그들이 영적 갈망을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이 위로부터 부어진 때는 언제나 심령의 상태가 큰 갈망으로 가득할 때였습니다. 일제시대의 억압에 우리 민족이 자연스럽게 복음에 대해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에서 크게 패했을 때 국민들은 자기들이 그 동안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하늘의 위로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 80년대 큰 부흥이 임했습니다. 우리가 이번 겨울에 가려고 하는 인도의 나갈랜드 역시 인도정부의 혹독한 억압과 탄압에 심령이 깨어질 때 비로소 70년대에 대대적인 부흥이 임했습니다. 이렇듯 은혜의 부으심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상한 심령으로 준비될 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십시오.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에서 단 한 번도 주님의 칭찬을 받아보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죽었다고 하던 사데교회도, 사이비지도자를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도 사실 어느 정도 칭찬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라오디게아 교회만큼은 전혀 칭찬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점점 물질주의와 산업자본주의 속에서 안주하고 타성에 젖어 가는 현대교회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안주하기 쉽습니다. 물질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연스럽게 군기가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미지근함은 바로 이 물질의 풍요로움 때문에 생긴 영적 질병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든 물질적 풍요가 반드시 이러한 미지근한 상태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깨어 있는 소수의 미국과 구라파의 복음주의자들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 속에서 우리 심령은 자연스럽게 부흥을 갈망하지 않고 추구할 다른 이유를 찾지 않으려 하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물질의 풍요를 은혜와 축복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풍요 속에 영적 안위를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물질을 사랑하고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사실은 물질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학과에 진학하고 좋은 학교에 편입하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실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물질적 풍요로움은 우리를 영적으로 미지근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를 영적 축복과 위로와 동일시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물질의 풍요를 영적 위로로 착각하며 그렇게 여기는 순간 우리는 심각하게 타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질적 축복과 평안을 주님의 축복과 평안과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습니다.
이와 같이 풍요로워질수록 라오디게아 교회는 한 가지 중요한 능력을 상실해갔습니다.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통찰력입니다. 물질이 커 보이면 신령한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영안을 어둡게 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탐심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구, 성공에 대한 욕구, 인정받고 싶음에 대한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입니다.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어떤 것을 주님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저는 군대에서 아주 편한 보직을 받고 고된 훈련을 면제받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인도하심으로 간증하는 것에 실족한 어떤 형제를 알고 있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런 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잘 사는 선진국의 크리스찬이 제 3 세계의 크리스찬보다도 영적으로 더 부요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를 살펴보면서 이미 배웠습니다. 전 세계 사건을 잘 보여주는 텔레비전이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핸드폰이 있어도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지는 못합니다. 인터넷이 아무리 잘 발달해도 성령이 가르쳐주시는 정보는 전달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많을수록 오히려 더욱 우리를 바쁘게 만드는 것이 많아집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러한 물질적인 풍요로움, 자본주의적인 발전이 우리로 하여금 영안을 어둡게 만들어갑니다. 물질과 매스컴이 발달되어 갈수록 기도에 등한히 하는 제 자신을 보면 더더욱 그렇게 확신합니다. 물질 그 자체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물질에 대한, 보이는 것에 대한 우리의 욕구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세상 패션에 민감할수록 영적으로 더욱 더 벌거벗게 합니다. 의료기구의 약품이 발달할수록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에 대한 체험은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교육여건과 환경이 좋아질수록 지능지수는 높아질지 모르겠지만 밤마다 교회 나와서 철야하고 산에 올라가서 철야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문제는 보이는 것에 대한 추구이고, 물질에 대한 욕심입니다. 영적인 것에 대해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영적 미지근함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처방전을 살펴봅시다. 자,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는 몇 가지 약품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당시에 많은 상인들이 새로운 상품과 약품을 소개하면서 길거리에서 장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주님도 장사군의 모습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러저러한 상품과 약품을 사라고 권유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금입니다. 둘째는 흰옷입니다. 셋째는 안약입니다. 넷째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가리켜서 ‘영적 무지와 영적 나태함을 치료하는 주님의 방법’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초마다 신앙을 새롭게 다짐합니다. ‘아, 올 한 해는 이러이러하게 열심을 내야지’라고 말입니다. 그러한 결심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자기중심적인 치료방법이기 때문에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처방전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약을 사야 합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그 약을 사야 합니다. 그 약을 사는 데 있어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얼마 전에는 약국에 가서 무슨 약을 달라고 했지만 이제는 먼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아야만 약을 조제 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스스로의 판단으로 처방전을 내려서는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먼저 주님으로부터 처방전을 얻고 약을 대가를 지불하고 사야만 합니다. 내 방식이 아니라 주님의 방식대로 해야 효과가 발생합니다. 성경이 바로 주님의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주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삶이 곧 승리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주시는 치료약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로, 금을 사라고 하십니다.
어떤 금입니까? 불로 연단한 금입니다. 시련으로 연단 받음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미지근함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시련과 연단이 없다는 것은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 안에 가난한 성도들이 없거나, 불편해한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고난을 자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참으로 부요하게 됩니다. 여러분, 영적 미지근함을 고치기 위해서는 시련과 연단의 가치를 되찾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없는가? 본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만한 상황 속에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풍부한 체험을 하기 원하십니까? 참으로 부요한 삶을 알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십시오. 자청하여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부요해질 것입니다. 적어도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자들과 어깨를 같이 하십시오. 그들과 교제하십시오. 그들과 사귀십시오. 그들을 섬기십시오. 그들의 영성이 여러분에게로 흘러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선교해야 합니다. 왜 하필 국내에 복음 전할 곳이 많은데 해외선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국내 전도 여행도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더 가난하고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현장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더욱 낮은 데로 옮겨가야 합니다. 제가 선교를 강조하는 이유는 진정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지경 밖으로 넘어갈 용기가 없이는 하나님의 크심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군에 있을 때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이 한 권 있습니다. A. J. 크로닌이 쓴 [천국의 열쇠]라는 책입니다. 정확한 기억인지 모르겠지만, 프랜시스와 한 친구가 있었는데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도시 교구를 맡아 크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성공한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인공 프랜시스는 중국으로 들어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책의 저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프랜시스의 삶이야말로 가장 풍성한 삶이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끝맺고 있습니다. 꼭 한번 읽어보십시오.
성경에서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도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하셨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16:25) 세상에서의 삶은 윤택하고 풍요로운데 저 하늘의 창고에는 텅텅 비어 있는 자의 말로를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무릇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눅12) 눅 12:33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세상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에 안주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삶이 윤택해지고 부유해지고 물질이 많아질수록, 아니 그러한 것을 진정한 삶의 목표와 인생의 행복으로 인식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가난하고 가련하고 곤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곤고하십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자청하십시오. 스스로 고난의 현장으로 자신을 집어던지십시오. 더 가지려는 몸부림을 중단하십시오. 더 낮아지려고 하십시오. 더욱 가난한 자들의 삶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올라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자리에 항상 임합니다.
둘째로, 흰옷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흰옷은 주님께 합당한 자가 입는 옷이라고 말합니다. 그 옷은 의의 옷입니다. 구주의 보혈로 씻어 희게 만들어 입혀주신 그리스도 자신의 의라는 옷입니다. 계3:4에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주님께 합당한 자가 입는 옷입니다. 합당하다는 말의 헬라어 “악시오스”는 ‘무게가 나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흰옷을 입는 자들이 누굽니까? 우리 주님께 의미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께 무게가 나가는 자들, 혹은 주님께 무게를 두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인생이 이 옷을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깊이 생각해봅시다. 나는 주님께 얼마나 무게를 부여하고 있는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는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 흰옷을 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의의 복음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구주의 보배로운 피로 이루신 그 놀랍고도 엄청난 구속의 사건을 살펴보고 또 살펴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안약을 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시다.
고대 라오디게아 도시는 이 안약이 매우 유명했다고 합니다. 온천에 나는 진흙에서 눈을 치료하는 가루약을 만들어서 팔았다고 합니다. 물에다 개어 바르면 아주 훌륭한 안연고가 된다고 합니다. 많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눈병에 관한 한 자신만만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내게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제공하는 안약은 영적인 통찰력을 가리킵니다. 분별력입니다. 이 분별력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이 참된 분별력의 원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 속에서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캐낼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모든 신성의 충만이 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엘리사에게 게하시라는 하인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람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엘리사를 찾아와서 문둥병을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표시로 물질을 드렸습니다. 엘리사는 극구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게하시는 나중에 몰래 뒤따라가서 은과 옷 등을 선물로 받아내고 자기 집에 감추어두었습니다. 엘리사는 영안으로 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게하시를 이렇게 책망합니다. “지금이 옷을 받을 때냐?” 그러자 게하시는 문둥병이 들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엘리사는 지금이 어떤 때인지 물었습니다. “지금이 도대체 어떤 때인가?” 우리는 지금이 종말의 때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바로 깨어 있음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한번은 아람군대가 자기 집을 다 에워쌌을 때 엘리사는 더 큰 천군천사의 큰 군대가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통찰력은 현실 너머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는 풍요한 물질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물질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을 인식하는데 완전 소경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벌거벗음을 볼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이 영적 통찰력은 대다수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과는 좀 다르게 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이 관점은 중심을 꿰뚫어 보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외관을 중요시하지만 이 관점은 영적인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대다수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이 비웃는 어떤 길을 가는 것입니다. 롯이 삼촌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어떤 땅을 선택했습니까? 곡초지가 많고 기름진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범죄와 문란한 삶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롯과 그 가족들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생활할 때에 그들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눈이 멀어 자기들의 영적인 곤고함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합왕 시대가 역시 그러했습니다. 오므리 왕조가 물질적으로 부요했지만 사실 우상숭배는 극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의 경우를 보십시오. 여호수아 14장에서 갈렙은 강대한 아낙 사람들이 거하는 험한 산지를 기업으로 달라고 요구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기엔 키 크고 건장한 골리앗과 같은 거인들이 딱 버티고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갈렙은 그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현실 너머 있는 하나님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사실 그 후에 그곳은 역사적으로 다윗왕이 통치하던 왕성이 되었습니다.
넷째로, 문을 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자, 주님께로부터 금을 구입했습니다. 흰옷을 사서 입었습니다. 안약도 사서 눈에 발랐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본문 19, 20절을 다시 봅시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물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감동했을 것입니다. 강하게 책망 받는 것은 아직도 사랑 받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회개의 기회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책망 받는 한 버림받았다고 낙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회개할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문을 여는 자에게 찾아가셔서 주님의 그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전도할 때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문맥을 통해 볼 때, 불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미 믿고 있는 신자들에게, 열심히 교회 다니며, 어떤 의미에서 칭찬 받고 있고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고급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대상은 미지근하여 토해내기 직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들도 여전히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서서 두드리노니” 이 표현에 사용된 동사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주님의 행동을 묘사합니다. 우리가 듣던 아니 듣던 간에 주님은 서서 우리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 마음을 열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이상한 체험이나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렇게 강제적으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우리 마음 문을 열기 싫어서, 귀찮아서,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들이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문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주님이 들어오시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싫어하는 마음을 여러 가지 핑계로 변명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문을 여는 것은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간절한 음성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와 사귀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이 얼마나 사랑스런 음성으로 우리 문을 두드리시는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을 환영해야 합니다. 그분께 우리 모든 삶의 주권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하늘의 부귀와 영광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 나누는 기쁨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문을 연다는 것은 주님이 내 삶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깊은 교제를 나누려고 하면 서로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바로 그러한 깊은 친교를 약속하십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문을 여십시오.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인정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주님을 거부하는 자아를 죽이십시오. 주님 아닌 것으로 만족하려는 심령을 깨뜨리십시오. 주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회복하십시오.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입니다.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우리 죄를 속하려 십자가를 지셨네
받은 고난 크셔라 모시어 들이세. (324장)
결론을 맺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위로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가난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다시 부요해지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몇 가지 보배로운 상품을 구입하기로 결단 내리십시오. 주님은 “내게서 사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에서 그러한 보배들이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책상에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의 자리에서 배우게 됩니다. 보십시오. 세상은 여러 가지 상품을 우리에게 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서 사라’고 하십니다. 그분으로부터 금을 사십시오. 그분으로부터 흰옷을 사십시오. 안약을 사십시오. 그리고 문을 여십시오.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풍성해지는 네 단계입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와 같은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여전히 주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은 처방전을 주십니다. 그것은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와 타협하는 현대교회가 새롭게 회복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 다 함께 이 처방전을 따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이 처방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존귀하심과 교제하심의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병든 우리 영혼을 치유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승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기기 원합니까?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원합니까? 그러면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지갑이 말하는 것에 귀기울이지 말고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십시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일수록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물질의 풍요함을 자랑하지 말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삶으로 자랑해야 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아멘.
'내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강해(11)-하늘에 베푼 보좌I (계4:2,3) (0) | 2012.03.03 |
---|---|
요한계시록 강해(10)-하늘에 열린 문(계4:1)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9)-빌라델비아 교회: 작지만 큰 교회(계3:7-13)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7)-사데: 유명무실한 교회(계3:1-6)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6)-두아디라: 지도자때문에 고통당하는 교회(계2:18-29) (0) | 2012.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