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10)-하늘에 열린 문(계4:1)

등불지기 2012. 3. 3. 16:50

부족한 저의 설교문은 10년도 넘은 것입니다. 오류도 문제도 있습니다. 다만 그때 제 마음을 적셨던 성령님의 감동이 저의 설교문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도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할 뿐입니다. 성령이여 임하셔서 눈을 열어주시고, 문을 열어주시고, 마음도 열어 주십시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10)

 

하늘에 열린 문

 

본문: 계4:1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우리는 계속해서 계시록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계시록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는 영광과 감사를 돌려드려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이 계시록을 통해서 성경 전체를 조망하는 눈을 얻게 됩니다. 계시록은 우리에게 창조부터 마지막 심판까지 역사 안팎에서 진행되는 위대한 구속 역사의 파노라마를 선명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시록의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계시록이라는 책의 성격을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그려주고 있는 책입니다. 따라서 이 계시록은 신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만큼 신구약 66권의 모든 메시지들을 이 한 책에 다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계시록은 신구약 성경의 결론인 셈입니다.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에 계시록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염두에 두고서 이 계시록의 말씀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성경 전체의 맥락을 놓쳐버리면 계시록의 진정한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도 실패하게 됩니다. 몇몇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에서 이 계시록의 말씀을 엉뚱하게 해석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잘못 인도하는데 사실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인 흐름에서 이 책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미혹의 길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계시록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그리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구원의 역사를 마음속에 그려봅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자연스럽게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특별히 계시록 4장과 5장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왜냐면 계시록 4장과 5장은 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배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본문을 씹어서 음미할 것입니다. 자, 다시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봅시다.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에 의해서 ‘밧모’라는 섬에 유배당했습니다.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 마귀는 종종 세상 통치자들을 이용하여 교회를 핍박합니다. 그것은 지금도 이슬람 국가와 독재국가에서 보고 있는 바입니다. 마귀는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을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도를 머나먼 섬으로 유배시키는 일에 성공했을 때 마귀는 이겼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유배된 요한 자신도 교회를 향한 어둠의 그림자가 더욱 진하게 드리워지는 것에 대해 우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갇힌 사도 요한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광경을 보면서 요한은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현실은 더 이상 교회가 패배하고 무너져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작금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스러져 가는 연약한 교회를 사랑하고 계시며 교회를 향하여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환상으로 보여주셨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붙잡아야 할 소망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현실은 세상 사람이 보기에 교회가 일어서기 힘들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마귀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밧모섬에 갇힌 이상 어떻게 교회가 힘을 쓰겠습니까? 지도자들이 하나둘씩 잡혀 순교하는데 어떻게 버텨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요한에게 영광스런 왕과 그 나라를 보여주셨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을 가두어 두고 있는 밧모섬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제한되지 않는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외쳐왔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40:6-8) 진리를 대적하는 수많은 원수들의 물결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경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가 확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우리의 문제에 너무 집착하는 나머지 그리스도의 무한한 영광과 그 나라의 혁혁한 권세와 위엄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감정에 너무 민감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데는 둔감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를 가두어 두고 있는 특정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음껏 역사하지 못하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도 요한이 되어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꿈도 계획도 비전도 다 포기하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우리 상황 때문에 약해지는 법이 없습니다. 여기 본문을 보십시오. 마귀가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가두어두었다고 자축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러한 사도 요한을 통하여 환난 가운데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상황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권능을 발휘합니다. 단,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불신앙이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나 어떤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제한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상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합니다. 우리의 염려와 불안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우리의 편견과 오만과 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제한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한이 있을지언정 결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상황은 하나님을 제한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일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게 빛나는 법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상황, 문제들, 여건들,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도 어찌하지 못하시겠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우리 밖에 결코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한없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진정한 영적 축복인 것입니다.

 

4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일 후에...” 계시록에서 이 표현은 여기 외에7:1, 7:9, 18:1, 19:1에도 나옵니다. 이 표현은 중대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이 일”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교회마다 다르게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도 요한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모시고 살았던 그였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주님의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교회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계시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교회에 맞는 말씀들을 계속해서 성령으로 들려주고 계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교회 안에 임재하여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온전히 주목하게 될 때에 비로소 참된 영적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끊임없이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하는 복음의 선포를 가리킵니다. 참된 복음의 증거 속에서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영광을 계시되고 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을 들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들어 살게 되면 우리는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실 하나님의 계획들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의와 거룩하심을 아는 것이며 그 앞에 선 나의 죄인됨과 무가치함을 동시에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상태입니다. “이 일 후에...”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 각 사람 하나하나를 다 알고 계시며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후에는 사명을 받게 됩니다. 장차 되어질 일들에게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내 안에서 행하실 일들을 알게 됩니다. 소명이 없으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온전히 주목하면 그 다음에 내가 할 일이 주어집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하나님이 내 안에서 하실 일들을 아는 것은 함께 갑니다. 그것이 “이 일 후에”라는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뜻입니다.

 

그 다음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습니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계시의 영을 부어주시는 주권을 갖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이제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천상에서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의 사건으로 초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영광에 대한 계시의 사건이었습니다. 요한은 교회의 영광에서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계시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계3:7,8절에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셔서 열린 문을 두시는 것을 봅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계3:7) 우리가 믿는 주님은 천국문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연구해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지 않으시면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면 주님이 열쇠를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도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지 아니하시면 도무지 되지 않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 구원은 가짜입니다.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스스로의 힘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력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논리상 모순인 셈입니다. 모든 참된 축복, 참된 은혜는 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요한복음10:9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사역을 해서 어떤 업적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의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해낸 업적을 자랑하기 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바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셨는지에 대해서 간증했습니다.(행14:27) 내가 어디서 어떻게 전도했다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주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다고 얘기합니다.(고후2:1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을 주셔야 전도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엡6:19) 무슨 얘깁니까? 하나님이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4:2,3)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시고 닫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노력으로 열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중단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번 열어주시면 아무도 그것을 닫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닫으시고자 하신다면 아무도 그것을 열지 못할 것입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실 때까지 쉬지 않고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문을 두드리십시오. 믿음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문이 열렸을 때 아무나 들어갑니다. 그러나 문이 닫힌 듯이 보여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리는 자가 되십시오.

 

사도 요한은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을 다시 들었습니다. 계1:10에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는데 이제 다시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는 나팔소리 같은 음성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계시하실 때 나팔소리 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보통 어떤 사람은 큰 믿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적은 믿음을 가졌다 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원래 큰 믿음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큰 믿음을 가지기 쉬운 성격이기 때문에 큰 믿음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그 차이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크게 듣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큰 나팔소리로 듣느냐 아니면 작은 모기소리만큼 듣느냐 여기에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큰 나팔소리같이 듣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산도 옮길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듣는 것만큼 믿음의 분량도 비례하여 정해지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듣는 것입니다. 이렇듯 계시의 사건을 경험한 인생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커다란 울림에 대한 충격과 흥분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의 많은 교회들처럼 환난과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들려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사도 요한을 통해 전세계에 흩어져서 고난당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하나님은 큰 나팔소리 같은 음성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소리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들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요한을 초대하시는 곳은 다름 아니라 하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요한은 지상교회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교회 안에 임재하여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이제 요한은 하나님이 친히 좌정해 계시는 하늘의 영광으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등산을 하다가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길을 잃으면 자꾸 밑으로 내려가려고 합니다. 그러면 영영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맬 수 있습니다. 길을 잃으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길이 보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모든 복잡한 길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문제가 생기고 삶이 힘들 때 우리는 높은 데로 올라가야 합니다. 높은 곳에서는 우리가 걸어온 길도 보일뿐더러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도 보입니다. 우리는 높은 데로 올라가야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깨닫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창세기를 깊이 연구해보면 아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현현하신 곳은 다 높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언약을 맺으시고 복을 약속하신 곳은 다 험하고 높은 산지였습니다. 평탄하고 비옥한 땅에서 현현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지방에 가면 산지에서의 집값이 평지에서의 집값보다 더 비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발을 인도하셔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하나님이 내 인생을 통해 이루실 일들을 알게 됩니다. 환난 많고 어려움 많은 이 세상 속에서 살지라도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로 날마다 올라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이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여기서 “마땅히 될 일”은 어떤 일을 가리킬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일들에 대한 계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계시록을 무슨 암호책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계 3차대전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 것인지를 연구합니다. 계시록을 가지고 아마겟돈 전쟁의 시기와 장소를 연구합니다. 계시록을 가지고 세계정치의 흐름을 연구합니다. 그런 시도는 다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땅히 될 일”은 그런 뜻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은 세상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가리킵니다.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전하는 종말의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에 되어질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요, 복음의 역사요, 영적 투쟁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당할 고난과 승리를 기록한 영광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세계 3차 전쟁은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 날 수도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고 안 일어나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복음역사입니다. 이 복음이 어떤 저항을 받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이 어떻게 승리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안을 높이 들어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가 보십시다. 부디 작은 것에 함몰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너무 작은 삶의 문제에 집중하다가 거시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위엄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분명히 이루실 일들을 이 말씀에 계시하셨습니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행하실 일들, 이 복음의 진보의 역사에 대해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마치 인공위성에서는 지구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찍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고, 또 반드시 이루게 될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에 대해서 눈을 들어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시적인 눈을 버립시다. 좁은 안목을 버리고 넓고 높은 영안을 가집시다. 이 같은 거시적인 안목을 소유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음 주에는 요한이 바라본 하늘의 영광을 묵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