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11)-하늘에 베푼 보좌I (계4:2,3)

등불지기 2012. 3. 3. 16:55

주님! 내 눈을 열어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주님의 보좌를 보게 해주십시오!

2001년 12월 9일 주일예배때 전했던 설교문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이 읽는 모든 분들에게 임하시기를...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11)

 

하늘에 베푼 보좌(1)

 

본문: 계4:2,3 / 2001.12.9(주일)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지난 시간에는 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하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주시고자 문을 여시고서 “이리로 올라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상황에서 벗어나 위로 올라가서 위에서부터 아래를 조망하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었습니다. 이제 오늘은 그 문으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하늘보좌를 보게됩니다. 사도 요한이 하늘 문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본 광경은 하늘보좌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의 무궁한 영광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잡아 이끌어서 땅에 두지 않고 하늘에 두도록 합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에서 벗어나 하늘에 열린 문을 바라보게 하시며 그 문을 통과해 들어가서 하늘의 놀라운 일들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이 위대한 계시의 말씀이 기록된 동기이기도 할 뿐더러 오늘 제가 강조하려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가 저 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고난과 환난을 이기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사도 요한 당시 수많은 교회들이 핍박을 당하고 있었고, 수많은 교인들이 잡혀 죽임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배는 공개적으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토굴이나 공동묘지 근처나 혹은 가정집과 같이 아주 은밀한 곳에서 드렸습니다. 교인들은 이 시련이 언제나 끝이 날것인 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희는 눈을 들어 하늘보좌를 바라보아라. 내가 여기 있노라!” 예, 하늘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가 베풀어져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힘든 고난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더라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것을 진심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는 충분히 인내하며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본문은 확실히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무한한 위로와 소망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머리 위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베풀어져 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위로와 용기의 메시지가 또 있을까요? 이 영광스러운 보좌를 바라보는 것만큼 신선한 즐거움이 또 있을까요? 가장 영광스러우며 가장 위엄찬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넘치는 소망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환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견디는 힘은 바로 이 영광의 보좌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시면 엘리사를 잡으러 아람왕이 많은 군대를 보내었습니다. 엘리사가 살고 있는 도단성을 겹겹이 에워쌌을 때 수종드는 사환이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깜짝 놀라서 펄쩍 펄쩍 뜁니다. “선지자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그럴 때 엘리사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그 종의 눈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그 사환의 눈에 무엇이 보였습니까? 더 많은 수의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서 있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 사환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때문에 기뻐하기보다는 보이는 적들의 모습과 위용 때문에 더 낙심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소경과 진배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응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이 하는 말에 귀기울여 보십시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우리 머리 위에 베풀어져 있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인식하는 것은 모든 천만 성도의 힘이요 소망이요 영감의 원천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저들보다 더 크십니다. 그리고 더 강하십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우리를 해하려는 적들이 많아 보입니까?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는 군대는 더 많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십시오. 보이지 않습니까?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보라’고 권면하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환타지 문학이나 영화에 몰입하는 것처럼 어떤 허상이나 망상에 빠지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것이지만 성경과 성령이 우리에게 ‘보라’고 도전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으로 영적 세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육신의 감각만을 의존한다면 영적 세계는 도무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에 익숙해 있으므로 영적인 것에 대해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감각에 상관없이 이 영광스런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성령에 감동되는 것은 계시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계시의 영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감동은 무슨 이상한 체험(이른바 ‘진동’과 같은)이 아니라 영안이 열리는 축복입니다. 하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는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당신의 영으로 친히 우리를 각자 감동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를 이것을 사모하며 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어떻게 성령 충만함을 얻게 되었는지 과정을 유의해보시기 바랍니다. 1절 말씀에 사도 요한은 이런 큰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의 크고 영광스러운 말씀을 듣는 순간 즉시로 성령의 충만한 감동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순간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중요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를 보세요.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신 일과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은 거의 동시적인 일이었습니다. 열흘간의 차이가 있지만 성령 받기를 위하여 기다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오순절 성령강림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또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를 보십시오. 사도베드로를 초청하여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그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습니다.(행10:44절) 왜냐면 성령께서는 증거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별도로 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이하에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14:26절을 보시면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임하십니다. 성령은 임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단집회와 참된 부흥집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악령이 역사하는 집회와 성령이 역사하는 집회가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느냐 않느냐? 입니다. 복음이 바로 선포되느냐 않느냐 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위대하게 선포되느냐 않느냐 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으며, 주목받고 있는가 입니다. 얼마 전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씨는 자신이 이단이라는 말을 들을 때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 자신을 믿으라”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능력을 행하고 기적과 이사를 행할지라도 복음에 어긋난 말을 마구 한다면,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는다면, 복음선포에 대해 소홀히 한다면, 이것이 바로 이단이요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체험이 있고, 간증이 있고, 기적이 있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할지라도 참된 계시의 영이 역사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성령은 계시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이라도 성경을 잘못 해석한다든지 자의대로 인용한다든지 하면 성령이 참으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는 안 되어 있는데 성령 받으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태도인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태도와 성령을 받는 자세는 같이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복음에의 열망! 이것이 성령이 감동하신 진정한 증거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 감동하신 증거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타납니다. 언제나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목하게 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 혹은 감동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과 전파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증거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임한 참된 열매는 증거의 삶인 것입니다.

이 계시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영안이 열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치게 됩니다. “보라” 사도 요한은 감격에 겨워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보라” 이것은 성령이 감동하신 사람이 당연히 외치게 되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충만한 감동이 있고 나면 영안이 밝아지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가 확 펼쳐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보이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를 의식하게 도와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라”는 말은 영적인 감탄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를 바라보고 감탄하게 됩니다. 저는 중2년 때 부흥집회 때 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나오는 데 온 세계가 달라져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밤하늘의 별들도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오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한결같이 “보라”고 외치게 됩니다. 영적 세계에 대해 눈이 뜨여지게 되고 놀라운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를 인식하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의 세계를 보십시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할 정도로 영광스러운 복음의 세계를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요한이 감탄했듯이 우리도 한번 감탄해봅시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쳐봅시다. “보라!”고 말입니다.

계시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하늘보좌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이 보좌는 온 우주의 중심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를 의식하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을 따라 살아가면서 종종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천상의 영광을 보여주시면서 다시 힘을 주십니다. 하늘에 베푼 하나님의 보좌를 보여주시면서 다시금 인내하게 하십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영광스러운 보좌를 의식하게 해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수록 이 은혜는 더욱 더 두드러집니다. 핍박과 고난의 현장 속에 있을 때 오히려 내주하시는 성령은 더욱 더 또렷하게 하늘의 보좌를 인식하게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 없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계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늘 보좌에 좌정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보좌에 앉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을 감동하신 성령은 가장 먼저 하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성부의 영광을 주목하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골3:1,2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우편이라는 말은 권능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시는데 예수님 안에 우리 생명이 감취었습니다.(골3:3) 우리 생명이 지금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면 우리도 그분과 함께 다시 나타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죽어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겁니다. 또,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겁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의 보좌를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난당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보좌가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 우리 생명이 숨겨져 있음을 믿으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참된 삶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참된 생명이심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생명은 이 땅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 보좌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믿음을 줍니다.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줍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곧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오늘 주님은 고난당하는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고난 많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끝날 것인가? 고민하지 말고 하늘에 베푼 보좌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하늘 보좌가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 참 생명이 바로 그곳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머리 위 하늘 보좌에 계십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같이 빛나네 해같이 빛나네

지극히 높은 위엄과 한없는 자비를 뭇 천사 소리 모아서 늘 찬송 드리네 늘 찬송 드리네

영 죽을 나를 살리려 그 영광 버리고 그 부끄러운 십자가 날 위해 지셨네 날 위해 지셨네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사요 저 사망권세 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큰 기쁨 넘치네

주님의 보좌 있는데 천한 몸 이르러 그 영광 몸소 뵈올 때 내 기쁨 넘치리 내 기쁨 넘치리. 아멘.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서 고난당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책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때는 정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확실히 정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마귀가 들끓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대로 역사는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가 교회를 마구 공격하고 주의 종들을 넘어뜨리고 하는 것을 볼 때 지금 당장 마귀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겁니다. 최후의 때는 지금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천하의 모든 것이 다 때가 있습니다. 지금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도 때가 있습니다. 원수들은 우리를 보고 비웃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때는 소리 없이 조용히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좁은 길을 걸어가는 모든 당신의 남녀 종들에게 참으라고 하십니다.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인내하라!!” 이것이 계시록 전체의 중심명령입니다. 계시록의 주제요절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말씀, 14장 12절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여러분,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지 그곳에서 참으십시오. 견디십시오. 앞서간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참으면서 이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선배들이 지금 우리를 격려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최후 승리는 반드시 다가옵니다. 아니 하나님의 승리는 지금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따라 모든 것이 착착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도무지 답답하고 견딜 수 없고 힘들고 주저앉고 싶으십니까? 하늘보좌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에 따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안 풀려도 하나님의 일은 착착 풀려나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엄연히 인정하는데서 우리가 안고 있는 실타래처럼 얽힌 삶들이 다시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 말씀대로 작정하신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는 가장 중요한 무대가 바로 하늘 문이요 하늘보좌입니다. 계속해서 하늘에 베푼 보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하늘보좌의 전체적인 의미를 살펴보았고 지금부터는 하늘보좌의 구체적인 모습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상세하게 그림처럼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각각의 묘사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이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사람의 말로 제대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그 거룩하신 영광을 이해한다는 것이 사람의 머리로 이해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보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오시는 그 날에는 이 영광스러운 보좌를 우리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계22:4절) 성경에 사도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한 사람이 몇 안 되는데 사도 요한과 비슷하게 묘사한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겔1:26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1:26~28절) 에스겔 선지자가 좀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사도 요한은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를 너무 자세하게 묘사하면 독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오해할까봐 간략하게 묘사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그 보좌의 형상은 정확하게 그림처럼 그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그려낼 수 있을까요? 한번은 어떤 분이 이 말씀을 기초로 하나님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지나치게 추측하려는 시도는 안됩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세하게 그려주지 않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그 자세한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느냐 입니다.

우선 이 두 말씀을 서로 비교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모양은 적어도 색채 면에서 세 가지 정도 두드러진 색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그 화려한 색감에 경외감을 품지 않을 영혼이 없을 것입니다. 그 색체는 무엇입니까? 진녹색, 적황색, 그리고 무지개입니다. 이러한 색체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기억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첫째, 벽옥과 같다고 했습니다. 벽옥은 녹색을 띤 수정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투명한 녹색 구슬과 같다는 겁니다. 둘째, 홍보석과 같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붉은 구슬’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불 모양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난다,” “불에 벌겋게 달군 쇠 같다”고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셋째로, 사면으로 비취는 광채는 무지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보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습은 여기까지입니다. 더 이상 자세히 모양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러한 색채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성을 보여줍니다.

구약에서 이 벽옥과 홍보석과 남보석과 같은 보석이 어디에 사용되었느냐? 출28장과 39장에 보면 대제사장의 흉패에 사용되었습니다. ①12가지 보석을 이 흉패에 붙이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벽옥과 홍보석은 그 보석 중에 첫째와 마지막 보석입니다. ② 이 흉패를 가리켜서 ‘판결 흉패’라고 불렀는데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을 각각 새겨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기념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12 지파를 ‘의롭다고 판단하시는 증거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죄인들을 불러 그들을 의롭다고 칭하시며 그들을 자신의 친 백성이라고 인치시는 증거판입니다. 즉, 너는 내 것이라고 인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줍니다. ③그리고 이것은 불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으며(고전6:9절), 거룩함이 없이 누구든지 주를 보지 못한다는(히12:14절)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지 지식적인 개념이나 지적인 동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의롭지 못함과 거룩하지 못함을 아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동행하며 섬겼던 선배들치고 자신의 죄인됨과 무가치함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던 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불의와 불결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칼빈이 말한 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자신을 아는 것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있는데 자신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분명 망상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진정으로 알고 계십니까? 의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영으로 대면해보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자신의 죄인됨에 대해 지나친 자기 연민으로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왜냐면 참으로 하나님을 대면할 때 두려워서 자신의 죽음과 같은 상태를 인식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러한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하고서도 죽지 않았음을 발견할 때 삼손의 부친과 같이 진정한 ‘여호와 샬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아는 것, 둘째, 자신의 죄인됨을 아는 것, 셋째,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러한 색채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보여줍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인식하고 두려워 떠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을 참으로 인식할 때, 우리 영혼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우리를 대하여 한없는 자비와 긍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서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보좌에 둘린 무지개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진실한 언약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9장을 보시면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노아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실 때 무지개를 증표로 주십니다. 다시는 홍수로 지상의 생명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 증표로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보좌에 둘린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반드시 신실하게 지키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보좌에 둘린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친히 사신 당신의 백성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고 미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해도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약속을 쉽게 어겨도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그 하신 약속을 어기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와 영광과 거룩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해서 알라는 겁니다. 이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자세히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본문이 말하는 바와 거리가 멉니다. 다 헛수고일 뿐입니다.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영광은 가히 짐작할 수 없는 것인데 우리가 그의 영광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그 하신 약속을 반드시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의롭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영광과 거룩함과 신실하심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참으로 바르게 아는 지식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문제가 다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되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너무나도 피상적이며 무지해져가고 있습니다. 신학서적은 많아져 가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대한 위대한 메시지는 점점 들어보기 힘들어집니다. 여러분, 교회사를 보십시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때를 살펴보면 어김없이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었던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지식도 높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영적으로 이 지식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기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을 전파할 때 가장 먼저 선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크신 영광이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선포입니다. 요일1:5절에,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은 그저 나에게 형통과 유익과 문제해결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것은 이기주의적인 복음이해입니다. 복음 자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잘못되는 겁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사도 요한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도응답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문제해결을 받고,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먼저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영광을 먼저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왜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선포했을까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알지 못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하게 되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되면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필요성을 알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구원은 우리와 거리가 먼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에서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미신과 망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고 내 문제, 내 필요를 먼저 생각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듭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고 들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려 들것입니다. 믿음이 신본주의에서 벗어나면 언제나 고상한 이기주의로 치우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내 신앙의 유익을 위해 내 마음대로 교회를 선택하려고 하는 경향입니다. 별로 은혜가 되지 않으면 교회를 옮겨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나만의 문제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나의 왕국은 생각하여도 하나님의 왕국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매달리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기복주의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명한 기독교사상가인 쟈크 엘룰이라는 사람은 현대교회를 가리켜서 [뒤틀려진 기독교]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열심은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을 낸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열심 낸 것입니다. 열심은 내는데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열심을 낸 것입니다. 모든 것이 뒤틀어진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나의 문제와 나의 필요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특징은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그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조금도 어둠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큰사랑 주님의 영광 할렐루야

형제자매 모두 함께 모여 찬송해 주님의 영광 할렐루야

하나님의 자녀여 크게 찬송 부르며 밝고 거룩한 길로 기쁨으로 나아가

주의 보좌 앞으로 속히 들어가겠네. 주님의 영광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