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선교는 너무 다릅니다. 목회의 영광은 한 편의 설교를 위해 몇 시간 며칠 몇 달 몇 년 아니 평생을 말씀과 씨름하며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이고, 선교의 영광은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손길을 느끼며 원초적인 복음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20년간 교역자로 섬기고 이제 선교지에서 또 다른 20년을 바라보며 그 모든 영광을 누리게 되니 저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 행복한 목사요 선교사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13)
보좌 앞의 유리 바다와 네 생물
본문: 계4:6,7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4: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많은 분들이 요한 계시록을 참 어렵게 생각합니다. 실제로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따라 이 계시와 환상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면 그다지 어려운 말씀은 아닙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아주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이 계시록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참 의도는 다름 아니라 ‘복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어떤 일을 하셨고,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시며,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가를 말씀하는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그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계시록은 복음서입니다. 이 귀한 책은 다름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서 이 계시록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복음을 알고, 이 복음을 간수하고, 이 복음을 보전하는 자가 소위 말해서 ‘신령한 성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신령한 성도의 특성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제껏 살펴 온 내용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사도 요한은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하심을 바라봅니다. 신령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점쟁이나 마술사처럼 신비한 어떤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은사가 많다고 반드시 신령한 것은 아닙니다. 신령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능과 존귀하심을 제대로 바라보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사도 요한은 2,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지상교회를 바라보게 됩니다. 신령한 자의 두 번째 영적 특징이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의 지상교회를 향해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각 교회들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신령한 성도의 두 번째 특성입니다. 그 다음 사도 요한은 4장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보좌로 안내합니다. 참으로 신령하고 참으로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보좌가 어떤지 알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바로 이 보좌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찬송의 의미를 잘 압니다. 당시 많은 환난과 시련과 핍박 속에 있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바로 이 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고,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며, 또, 우리 머리 위에 하늘 문이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 위에 영광스럽고도 존귀하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더 강력한 위로의 메시지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 사도 요한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리고 6장부터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하늘과 땅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는 지 보여줍니다. 사단의 강력한 반발이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은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최종 승리를 얻을 것이며 그분의 나라는 영원히 세워지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는 것으로 계시록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계시록을 재미있게 또 은혜롭게 읽으시려면 먼저 전체적인 흐름부터 파악하셔야 합니다. 숲을 관찰한 다음 나무를 살펴야 길을 잃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계시록 전체의 흐름은 일관성 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에 행하실 그 놀라운 일들에 대한 메시지가 바로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증거 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유리바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 다음 네 생물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리바다와 네 생물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리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 걸까요? 먼저,“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유리는 너무너무 흔한 것입니다. 유리창, 유리컵, 유리장식, 유리그릇,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사도 요한 당시에 ‘수정과 같은 유리’는 얼마나 값비싼 물건이었는지 모릅니다.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 바로 유리였습니다. 이런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솔로몬 당시 솔로몬이 앉았던 보좌의 앞에 난 길은 유리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은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했을 때 보좌 앞에 있는 그 유리로 만든 길이 너무나 맑아서 물인 줄 착각하고서 젖지 않으려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로 가는 길이 얼마나 화려하고 위엄스러운가를 나타내는 말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유리가 실제로 있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유리 바다라고 했을 때 우리는 실제 ‘유리’가 아니라 ‘유리바다’라는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유리바다’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유리’와 ‘바다’라는 이미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이러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성령의 조명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자, 유리바다에 대한 계시록의 문맥을 살펴볼까요? 여러분이 계속해서 계시록의 말씀을 읽어보시면 이 ‘유리바다’가 무엇을 뜻하는 지 대충 짐작이 갈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이 ‘바다’가 많이 나옵니다. 계시록13장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그러니까 이 바다 속에는 짐승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또, 계시록 15:2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이 말씀에 보면 바다는 하나님의 심판이 실현되는 ‘세상’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 유리바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가리킵니다. ‘유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바다’는 심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유리바다를 벗어나서 죄악 가운데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됩니다. 이것은 저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홍해바다를 건넌 후 하나님의 구원하신 능력을 찬송했던 때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계속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노래를 부릅니까? 예, 모세의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이 바다는 저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홍해바다를 건널 때를 연상케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유리바다는 영적인 홍해바다인 셈입니다. 또 21장 1절로 넘어가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완전한 구원이 실현되는 그 날에는 이 유리바다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면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유리바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시기까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유리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매우 중요한 특징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 유리바다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할 영적 심판대인 셈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은 이 유리바다를 통과하여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구원하신 은혜를 찬송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상관없는 자들은 이 유리 바닷가에서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사히 건넜지만 바로의 군대들은 이 바다에서 심판을 당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들을 죄악 가운데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놓여있는 이 유리 바다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누구든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이 유리바다를 통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영적인 홍해바다를 건너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모든 죄인들에게 “과연 누가 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가기 위해서 이 유리바다를 건널 수 있겠느냐?”라고 도전합니다. 그러나 오직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만이 이 유리바다를 통과할 것입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종들만 벗어나서 구원의 은총을 노래할 것입니다. 이 유리바다는 구원받는 자와 심판 받을 자를 구별시키고 격리시키는 하나님의 의를 가리킵니다. 지금까지 사도 요한이 말씀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과연 누가 이 엄위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핑크빛 희망만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음은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이 무시무시한 유리바닷가에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다 투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이 유리바닷가에서 우리는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듯이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돌이킬 수도 없는 절대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번개와 뇌성이 나는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유리바다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거대하고 불붙는 유리바다 앞에 서 있습니다. 뒤에는 우리를 쫓아오는 원수들이 있고 앞으로는 불붙는 유리바다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복음은 이 엄연한 영적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이 현실을 직시하게 된 인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어떻게 하시렵니까? 오직 어린양의 피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이 유리바다를 통과해서 벗어나는 길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인 줄 믿습니다. 이 유리바다는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반드시 건너야 할 곳이며,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건넜던 곳이기도 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곳이며 다른 모든 인생들은 이곳에서 영원한 죽음을 경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유리바다는 과거에 홍해바다를 건넜던 이스라엘의 경험과도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 구원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출애굽을 맛보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이 유리바다를 건너셨습니까? 이 바다를 건너면서 맛보았던 그 환희와 황홀함을 알고 계십니까? 구원이라는 그 놀라운 황홀함과 짜릿함과 신비함을 알고 계십니까?
그 다음 보좌 앞과 주위에 네 생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네 생물’이라고 했는데 잘못 이해하시면 ‘네 동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짐승이나 동물이 아닙니다. 올바른 뜻은 ‘네 피조물’(four creatures)입니다. 이 피조물이 하는 역할은 하나님의 보좌를 옮기는 일을 합니다. 에스겔서 1장을 읽어보시면 이들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네 생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거룩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보좌를 옮기고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 바로 이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가 보 환상 중에서 이 네 생물이 활동했습니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은 이 표현을 가지고 무슨 우주선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사람의 언어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피조물들 중에 가장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네 생물들은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눈은 보는 것 아닙니까? 앞뒤에 눈이 가득하다는 말은 앞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뒤로는 모든 피조물들을 봅니다. 이것이 네 생물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앞으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어떤 의도를 갖고 계시는지 봅니다. 그리고 뒤로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를 두루 살펴봅니다. 이것이 네 생물들이 가진 능력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종종 하나만 보고 다른 하나는 못 봅니다. 저도 하나에만 집중하면 다른 것은 전혀 귀에 안 들어오는 타입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옆에서 아내가 무엇을 말해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수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치려고 하는데 잘 안됩니다. 그런데 이 네 생물에게서 배울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뜻을 가지고 계신지 늘 두루두루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을 두루두루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과 세상을 아는 일에 우리는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한 손엔 성경을 다른 한 손엔 신문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실력 있고 세상에서도 실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거나 혹은 범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한 쪽 눈을 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두 눈을 다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 인간들에게 두개의 눈을 주셨을까요? 저는 한쪽 눈으로는 하나님을, 다른 한쪽 눈은 삶을 바라보라고 그렇게 만드신 줄로 믿습니다. 신유의 은사나 상담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이 이렇게 두 눈과 두 귀를 이렇게 균형 있게 사용하는 훈련을 잘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쪽 귀로 들으면서 한쪽 귀는 하나님께 열려있습니다. 한 눈은 사람을 보는데 또 한 눈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 두 가지 훈련이 잘 되지 않고서는 쉽게 넘어지기 쉽습니다. 여러분,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런 훈련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한쪽은 늘 하나님을 향해 열어두어야 합니다.
이 네 생물들이 하는 또 다른 역할은 쉬지 않고 찬양을 드리는 일입니다. 8절에 있듯이 밤낮 쉬지 않고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두시는 측근은 예배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밤낮 쉬지 않고 끊임없이 찬양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자들인 줄 믿습니다. 자, 한번 정리해볼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보좌에 대해서 계속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내주는 여러 가지 형상들은 모두다 하나님의 거룩성과 권능과 위엄을 나타내주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께로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들을 깊이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깊이 체험하는 것이 이 환난 많고 시험 많은 종말의 때를 승리하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될 때에 우리는 어떤 시험이 와도 끄떡없을 것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기쁨으로 막아낼 것입니다. 잘 될 때 교만하기 않게 될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될 때에도 결코 좌절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과 권능과 영광을 알면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있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계속해서 네 생물들이 하는 일들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본문은 사도 요한이 본 환상 중에 보좌에 둘러선 네 생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6절에 보니까 네 생물은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네 생물이 하는 역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보좌를 옮기고 수호하는 일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옮긴다는 것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강림하신 것과 유대포로백성들 가운데 환상으로 강림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특히 그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되어지는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벨탑을 심판하실 때 강림하셨던 것처럼 장차 이 땅을 심판하기 위하여 그렇게 강림하셔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네 생물은 보좌를 수호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보좌를 보호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성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네 생물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사람 얼굴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성격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자 같다는 말은 피조물 들 중에서 가장 위엄 있는 존재임을 가리키고, 송아지 같다는 말은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힘이 강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사람얼굴 같다는 말은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말이며, 마지막으로 날아가는 독수리 얼굴 같다는 말은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권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보좌를 받드는 네 생물들은 모든 피조물들을 대표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권세와 능력과 위엄과 지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실 때 드러내신 성품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네 피조물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존재들입니다. 에스겔서 1장을 보면 이 ‘네 생물’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모습과 사도 요한이 본 모습이 표현 상 약간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라본 각도와 목격한 시간, 그리고 증인의 의도와 성격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는 것인데 본질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날개가 4개냐 아니면 6개냐의 문제는 성경학자들 간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보통 4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를 그룹으로, 6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를 스랍이라고 하는데, 속죄소 위의 그룹은 날개가 2개인 것으로 보이며, 그렇게 볼 때 날개의 수에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그들이 동일한 존재이지만 그들의 행동에 따라서 4개로 보일 수 있고 또 6개로 보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에스겔서1장, 10장, 출25장, 시18:10, 계4장 등에 묘사된 천사의 모양은 사람의 언어로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들이 하는 역할이 더 중요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뛰어난 피조물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타고 다니시며, 그들 사이에 임재하여 계십니다. 출애굽기 25장과 민수기 7장을 보면 하나님의 이러한 임재는 속죄소 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복음진리의 면을 시사해줍니다. 오직 죄를 대속하는 보혈이 뿌려지는 곳에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임재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네 생물들이 날개가 몇 개냐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 생물이 어떻게 생겼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하는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시인하고 복종합니다.
먼저 그들에게 여섯 날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6장을 보시면 스랍들이 나옵니다. 스랍은 각 여섯 날개가 있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날면서,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날개는 하늘을 나는데 사용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는데 사용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위엄 있고, 가장 힘이 세며, 가장 지혜로우며, 가장 권위 있는 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거룩하지 못함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할 때나 일상생활 할 때 하나님을 마치 자기 친구 대하듯이 말을 마구 함부로 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친구에게 대하듯이 함부로 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갈수록 나는 더욱더 죄인이요 부족하며 무능하며 거룩하지 못한 사람임을 더욱더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참 하나님을 체험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신을 아는 지식과 비례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있는 거룩한 천사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많은 날개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날개를 자랑하는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얼굴과 발을 가리는데 그 날개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그 날개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더 얼굴과 발을 가려야 할 것입니다. 은혜 받은 자, 신령한 성도는 무엇보다 겸손한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자신의 죄인됨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거룩하지 못한지 진심으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내 얼굴과 발을 가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살펴봅니다.
그들의 안과 밖에 눈이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눈은 바라보는 기관입니다. 살펴보는 기관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첫째,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둘째,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 세계를 바라봅니다. 피조 세계에 행하시는 일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에 대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낙심합니다. 그리고 세상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살피고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살피는 데만도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으로 가보시면 지성소 안에 속죄소가 놓여 있습니다. 그 속죄소 위에는 그룹이 날개를 높이 들어 속죄소를 덮고 있으며 그들의 시선은 속죄소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늘의 천사들이 대속의 십자가 사건을 살펴서 연구한다는 겁니다. 벧전1:12에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출세와 번영과 성공입니까? 우리를 억누르는 세상세력과 사단의 불같은 시험과 온갖 시험과 시련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했는데 무엇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까? 오로지 우리의 모든 시선과 관심을 하나님께 두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고 몸부림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시는 일, 그리고 하실 일들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분이 하신 일, 하시는 일, 그리고 장차 하실 일들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생물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환난과 시련과 핍박과 유혹을 이기는 승리의 길이기도 합니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쉬지 않고 노래합니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쉬지 않고 노래 부르는 겁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그들은 안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항상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밖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행하시는 일과 장차 행하실 일들을 끊임없이 찬송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보좌에 분명 가까이 가본 사람이었기에 그런 말을 한 줄 압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면, 그분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분이 행하신 일들과 행하시는 일들과 장차 행하실 일들을 알면 끊임없이 노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물으실지 모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이 이렇게 내 주위에 산적해서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 적어도 우리의 눈이 우리 자신과 우리 환경을 바라보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하신 일들을 연구하고 살펴보는데 조금만 시간을 내어도 우리 마음은 변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바라보십시오. 연구하십시오. 시간을 내어 그분을 찾으십시오. 짬을 내어 그분을 묵상하십시오. 잠시라도 좋으니 그분의 영광과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숙고해보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네 생물들이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열심히 뭔가 하고 있는 일들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 중에 가장 탁월한 천사들이었습니다. 가장 위엄 있고, 가장 힘세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권위 있는 피조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하는 일들을 한번 연구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지 잠간만이라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함을 알고 부끄러워 얼굴과 발을 가립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살펴보며 연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끊임없이 찬송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기 원하십니까? 오늘도 승리하기 원하십니까? 믿음이 아니면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믿음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갈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커져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의 크기는 비례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이렇게 우리에게 행동할 것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십시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 하시는 일, 장차 하실 일들을 살피고 연구하는 일에 좀 더 시간을 내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일이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삶으로 증명해보이십시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거룩하심을 잘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죄인들인지 모릅니다.
지극히 높고 강력하며 지극히 위엄 있고 지극히 지혜로운 스랍들도 주님 앞에 얼굴을 가립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우리 얼굴을 가리게 하시며
그들이 주님과 주님의 하신 일들을 더 알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더 알고자 노력하게 하시며,
주님이 하신 일들을 더 많이 끊임없이 찬송하게 성령으로 은혜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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