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이 내 입술에 꿀과 같습니다! 부족한 제 설교문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이 달콤함이 경험되어지기를...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12)
하늘에 베푼 보좌(2)
본문:계4:4,5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서론으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주의할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절대 억지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문맥을 무시하거나 역사적인 배경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겁니다. 성경은 항상 문맥과 역사적인 배경을 중심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대로 풀어야 하는데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억지로 풀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는 이런 점에서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면 성경의 가장 마지막 책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는 성경전체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24보좌가 둘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24보좌 위에는 24장로가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사도 요한이 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통해서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여러분, 24보좌에 앉은 장로들이 누구이며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저는 평소에 생각하기를 24보좌와 24장로는 구약의 12 지파와 신약의 12 사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은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면 24장로의 반열에 사도들도 포함된다면 지금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24장로들은 누구일까요? 여러분, ‘장로’라고 하면 누구입니까?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자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우리 교회의 열 분의 장로님들은 3,000여명 되는 모든 세광교인들의 대표자들이신 것입니다. 대표자이시기 때문에 당회에서 결의하고 결정한 사항은 우리 모두가 결정한 것으로 믿고 존중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상에 있는 이 24장로들은 천상에 있는 모든 신실한 자들을 대표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들은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천사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들을 가리켜서 ‘장로’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이사야24:23절) 그러니까, 여기 사도 요한이 목격한 24장로들은 천사들의 직급 중에서도 가장 우두머리에 속한 천사들입니다. 이 천사들은 모든 신실한 성도들과 신실한 다른 천사들을 대표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24장로들이 천상에서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서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24장로라고 했는데 왜 24명입니까? 24라는 숫자가 특별히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까? 왜 24명의 숫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24라는 숫자가 24장로들이 하는 일들을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입니까? 24라는 숫자는 천상에서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반차, 반열, 내지 순서를 가리킵니다.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낮고의 서열이 아닙니다. 평등하게 하나님을 돌아가면서 섬기는 순서를 가리킵니다. 여러분, 역대상 24장과 25장을 집에 가셔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전에 무슨 일을 했습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할 때를 대비해서 아론의 자손들을 24 반차로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차등이 없이 돌아가면서 하나님의 성소의 일을 다스리는 직무를 맡긴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성소를 섬기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질서를 잡을 필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24 반차로 나누어서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수종들도록 한 것입니다.(대상24장) 그리고 대상 25장을 보시면 다윗이 또 24 반차를 나눕니다. 다윗 당시 아삽, 헤만,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성소에서 찬양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소에서 수금과 비파와 제금으로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성가대원들이 너무 많은 겁니다. 그래서 누가 높은지 낮은지 누가 스승이던지 제자이든지 관계없이 공평하게 제비뽑아 직무를 맡겼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24 반차로 나누어서 하나님의 성소를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신령한 찬송을 부를 자들을 제비뽑아 나눈 것은 다윗이 스스로 지어낸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윗은 그가 신앙생활하면서 천상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단지 일국을 다스리는 왕이기 이전에 천상의 예배를 알고 천상의 예배를 체험해본 예배자였습니다. 다윗은 임금이기 이전에 예배자였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체험한 천상의 예배조직대로 지상에서도 조직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천상에서 24개의 반차대로 가장 뛰어난 천사들이 모든 천상의 신실한 자들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목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요 신자여야 하고 한사람의 신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것은 예배자가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지금 누구를 찾고 계시느냐? 한 사람의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훌륭한 봉사자가 되는 것 아름답고 좋습니다. 은사자가 되어 능력 있게 복음전하는 일도 좋고 선합니다. 기도의 능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충성하고 주어진 여러 가지 선한 일들을 잘 감당하는 것 얼마나 보기 좋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배자가 우선입니다. 왜냐면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예배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참된 예배자가 먼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지금 열심히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그저 예배에 참석하면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했다고 반드시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영어로 ‘WORSHIP’(worth+ship) 즉 ‘가치를 높이다.’ ‘가치를 인정하다.’는 뜻입니다. 만약 주일 예배에 참석했는데 마음 한 구석에는 하나님보다 자기의 가치를 더 높이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종종 “예배를 보자”라는 말을 듣습니다. 문자 그대로 예배를 볼뿐이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에 참석하지만 참석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배드린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고 하나님을 높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까? 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영으로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육으로는 절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셋째,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진리를 배우지 않고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함이 없이 감정만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정확한 인식 위에 기초해야 합니다.
여러분, 역대하 16:9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합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절)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까?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고 찾는 것”입니다. 온 맘과 온 힘과 온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구하는 예배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을 바라볼 때 솔직히 저 자신을 포함해서 참된 예배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인수는 늘어나는데 말입니다. 예배 보는 사람은 많아져 가는데 예배에 진정으로 참여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사람은 줄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①예배는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나를 한없이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슬렘 교도들이 라마단 금식 대회를 열 때 어떻게 합니까? 길거리를 가다가도 기도시간이 되면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이마를 땅에 대고 알라에게 경배합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 어떻습니까? 정말 고개 숙여 진심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인정해드리고 있습니까? 또, ②예배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24장로들이 하는 주된 사역이 바로 노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찬양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하는데 기도가 안됩니까? 기도줄을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가 될 때까지 찬송 부르는 것입니다. 또, ③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예배는 말씀을 귀기울여 잘 듣는 것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말씀을 들을 때 꾸벅꾸벅 졸고 있다든지 하면 바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본문을 바라봅니다. 하늘 보좌를 둘러서서 24보좌들이 있고 그 위에 앉은 24장로들이 있는데 그들은 천상에 있는 모든 신실한 자들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면서 예배하는 뛰어난 천사들입니다. 24보좌들은 그들이 아주 높고 아주 고귀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이 정결하며 순결하며 빛이신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에 금 면류관을 썼다는 말은 천상에서 매우 존경받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오직 정결하고 승리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바로 예배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24보좌들과 장로들에 대한 묘사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천상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24보좌가 둘러 있고 그 위에 24장로가 앉아서 하나님을 높이며 예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근본적인 도전을 받았습니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할까 염려하지 말고 무엇보다 먼저 예배자가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바른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되기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지면을 두루 살피시면서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살아가면서 예배자가 먼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망각하고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것을 주시지 않을까 고민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서서 24장로들이 예배자로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바로 예배자였다는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참 예배자를 제일 가까이 두십니다. 예배자를 최측근으로 두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리건데,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지 말고, 주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안 해주시는 가 안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보좌에서 나는 천둥 번개와 음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특히 계시록과 같은 예언서를 대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뭐냐 하면, 본문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상징으로 믿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도 위험합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잘못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재림날짜를 연구하는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이나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재림하신다고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이 그 예입니다. 반면에, 성경을 상징으로만 받아들여도 이단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재림하신다고 했는데 이 구름은 수증기이고 수증기는 물이고 물은 곧 말씀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실은 예수님은 말씀전하는 자로 이 땅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엉뚱하게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중도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첫째는, 문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그리고 성경전체에서 서로 조화되는지 작은 문맥과 큰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로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마겟돈이라고 할 때 사도 요한이 정말 제 3 차 세계대전을 의미했는지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는 하나님의 보좌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했는데도 에스겔과 같이 “단 쇠”같다고 볼 수 있고, 사도 요한과 같이 “홍보석”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어떤 단어를 선택하는 가는 저자의 신학(神學)과 성령의 의도(意圖)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고 특별히 성령이 깨닫게 하여 주지 않으시면 도무지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볼 때도 사실 어렵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오늘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난다는 말씀과, 둘째,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난다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더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천둥번개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장마철에 하늘이 캄캄해지고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데 바로 옆에서 번개가 번쩍하면서 ‘우르르...쾅’하는 천둥소리가 귀가 멍할 정도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럴 때 느낌이 어떻습니까? 겁이 나죠? 내가 벼락맞을까봐 조마조마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무섭습니까? 얼마나 조마조마합니까? 길을 가면서 ‘혹시 나에게 벼락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라고 겁나지는 않습니까? 애들은 어떻습니까? 번개가 번쩍하고 벼락이 ‘쾅’ 떨어지고 천둥이 ‘우르르’ 소리를 내면 애들은 막 웁니다. 엄마 품에 안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니까,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보니 바로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바로 그런 천둥번개가 막 몰아치더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본문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가장 본질적인 계시를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던 것과 다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평소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다소 엄하셔도 그래도 무엇인가 든든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본문을 보니까 우리가 믿는 아버지는 아주 무서운 아버지이십니다. 예, 맞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믿는 아버지는 아버지십니다만 아주 위엄이 있으시고 아주 무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대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대로 하나님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아버지는 나를 키우실 때 이렇게 하셨더라. 따라서 우리 하나님도 이렇게 나를 양육하실 것이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추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시도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계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19장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친히 강림하시는 광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광경이 오늘 사도 요한이 묘사하고 있는 것과 똑 같습니다. 출19:16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제 삼 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예,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좌로부터 나는 천둥번개와 큰 나팔소리에 떨고 있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사도 요한이 목격한 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홍보석’같다고 했지 않습니까? 에스겔은 마치 ‘불에 달군 쇠’와 같다고 했지 않습니까? 모세는 불 가운데서 임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현은 각기 다르지만 하나님의 보좌는 변함없습니다. 계속해서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사도요한이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난다고 했는데 모세가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셨다고 했습니다. 계속 넘어가서 22절과 24절을 읽어보시면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나오는 표현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왜냐면 하나님이 너무나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모든 불결함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천둥번개가 몰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를 한번 구경하려고 시내산으로 올라오는 자들, 그리고 정결하지 못한 자들에게 벼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고 두려우십니까? 계속해서 출애굽기 20장으로 넘어가서 18절부터 20절까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보좌가 너무나 영광스러워 빽빽한 구름으로 가리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천둥번개와 동시에 들리는 음성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 하나님이 직접 자기들에게 말씀하지 않도록 간청하고 있습니다. 왜나면 하나님의 보좌가 사람 눈에 보기에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신들이 너무나도 허물 많은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무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 사실을 알면 사람은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건데, 우리는 이 무서운 하나님의 위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세가 뭐라고 말합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보좌가 직접 강림한 것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범죄치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타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죄를 이기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지금까지는 너무 부드럽고 너무 온화하고 너무 용서하기 잘하시고 너무 관용하기 잘하시는 분으로만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기 이전에 불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구약에서는 무서운 하나님이시지만 신약에서는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신약에서도 구약과 똑같이 하나님의 무서운 위엄을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2:29절에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시내산에 강림했던 하나님의 보좌는 지금도 동일하게 변함이 없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불이십니다. 그래서 제사드릴 때 제물 위에 불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드린 아론의 두 아들을 불로 태워 죽이셨습니다.(레9,10장) 또, 민수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중에 당파를 지어 모세와 하나님을 대적한 고라 일당을 불로 태우셨습니다.
또 계시록 20:9,10절을 보십시오. 마지막 날에 악한 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모였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소멸하리라고 했고 그들을 미혹한 마귀와 거짓 선지자들과 짐승들이 불 못에 던져지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 간수하신 바 되어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셨다고 했습니다.(벧후3:7절)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도 하나님은 불이시라는 말씀은 안 믿고 있습니다. 안 믿으려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만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무섭고 신약의 하나님은 안 무섭다는 마귀의 거짓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불이십니다. 거룩하시며 지극히 높고 영화로우십니다. 매우 크고 위엄 있으시며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권능과 영광을 모르고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의 의미도 절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영광을 알아야 하나님의 사랑도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침체되어져 가고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적당히 신앙생활 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감격이 식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천둥번개가 치고 있다는 이 말씀을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엄 있으시며 불같으신 분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만 듣고 신앙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불을 겪어보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자비하심도 체험하지 못합니다.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이와 같이 천둥번개와 함께 선포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엄청난 권위가 있고 파워가 있고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절대 이 말씀을 흉내 내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음성’이라고 했는데, 이 음성은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전 영혼을 송두리 채 뒤흔드는 강력한 음성입니다. 우리는 이 음성을 들을 때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할 때 그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인지 마귀가 한 말인지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무릎꿇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절대 공포가 아닙니다. 깊은 사랑과 존경과 경외심이 배어 있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음성이나 내가 마음으로 만들어내는 음성은 절대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마귀의 음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듭니다. “나는 죄 없다”“나는 무죄하다”고 주장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감--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의 특징입니다. 마귀의 음성이나 다른 말은 이 거룩한 음성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감이 없는 평안은 거짓 평안입니다.
계속해서 계시록을 보시면 앞으로 세 번 이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음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계시록 8:5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이 말씀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모아져서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땅에 놀라운 부흥을 일으키시는 응답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마음이 찔림을 받아 “어찌할꼬?” 절규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또, 사도들이 공회에서 매 맞고 쫓겨난 뒤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하셨습니까? 성령충만을 주시고 지진을 일으켜주셨습니다. 계시록의 말씀대로 이루어주신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체험하고서 더욱더 담대하게 말씀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또, 교회사에 나타난 위대한 부흥의 주역들을 보면 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모아질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서 응답해주시는 겁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스펄전, 화이트필드, D.L.무디, 한국의 길선주 목사, 등 수많은 증인들을 예로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나던 시기에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워 벌벌 떠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는 천둥번개와 동반하는 말씀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교회부흥역사가 증명합니다. 부흥이 임할 때마다 “형제여, 어찌할꼬?”라고 절규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실까요?”“하나님께서 나를 지옥으로 보내시면 어떡하나?”라고 절규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음성을 들은 결과입니다. 또 동일한 표현이 계시록 11:19절에도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는 16:18절에 나옵니다. (이 부분까지 다 다루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며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 여러분,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줍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깊은 두려움과 경외감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해줍니다. 마귀는 우리 곁에 와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하나도 안 무서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네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은 관용을 베푸실꺼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이 말은 명백히 마귀의 음성이요 거짓말입니다. 왜요? 우리가 마음 놓고 범죄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마음 놓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도 전혀 죄책감 없이 살아가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고난도 전술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에덴동산의 하와에게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거짓말했던 것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마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온갖 거짓말로 우리를 속입니다. 하나님의 두려우신 엄위와 영광을 언급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신학자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한 인본주의는 마귀의 가장 높은 전략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의인이 누굽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불의한 자가 누굽니까? 어리석은 자가 누굽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왜 두려워해야 할까요? 모세가 말한 대로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시며, 얼마나 거룩하시며, 얼마나 그 말씀이 엄위하시며, 얼마나 권능이 있으시며,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그런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범죄하는 길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무서워해야 “아, 내가 주님의 십자가 은혜 없이 결코 살 수 없는 죄인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사도요한은 오늘 우리에게 범죄하지 않는 길을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가 시험 당하고 고난당하고 핍박당하는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승리하는 비결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천둥번개소리처럼 들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엄하심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는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승리자가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보좌 앞에 켠 일곱 등불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5절 하반절에는 성령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오늘은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령님은 교회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성령을 일곱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일곱 등불’하면 구약의 성막에서 성소의 좌편에 있는 일곱 금촛대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계1:20절을 보시면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불러모으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여기 나오신 분들은 그냥 나오신 것 같지만 사실은 성령께서 불러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는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의 모임을 성전으로 삼기 원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몸은 성전입니다. 우리들의 모임도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늘 의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을 항상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하나님의 성령,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임하여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가 참 성도요 참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의지하는 여러분, 고난 중에 있습니까? 힘드십니까? 어렵습니까? 답답합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임재하여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눈이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둘째, 성령님은 예수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스가랴3:9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돌은 종말의 때에 세워질 성전의 기초석을 말합니다. 이 기초석은 바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자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이 말은 성령은 결코 자신을 증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과 교통한다고 자랑하는 말을 하면서 자기는 성령과 충분히 교통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큼 거짓된 말은 없습니다. 성령과 대화를 나눈다고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재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똑 같은 속성을 갖고 계시지만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증거의 영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그의 삶 속에 예수님의 인격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과 십자가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영을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싶어집니다.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역사하는 영을 다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참으로 예수의 영을 마음 속 깊이 모셔들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령님은 전 세계에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은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옵니다. 왜 ‘일곱’이라고 했을까요? 사도 요한 당시에 ‘7’이라는 숫자는 전 세계를 떠받들고 있는 기초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일곱 영’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전 세계에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며 어디든지 계실 수 있으시며 어디서든지 통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겁니다. 스가랴 4:10절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십니다. 두루 다니시면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죄인을 찾으시는 겁니다. 일군(worker)이 아닌 예배자(worshiper)를 찾으시는 겁니다. 사람을 찾으시는 겁니다. 계시록 5: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일곱 뿔을 가졌다는 말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다는 말이고, 일곱 눈을 가지셨다는 말은 예수의 영이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통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하나님의 눈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다 꿰뚫어보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139:1-8)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가지고 기도하러 나왔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누구보다 심지어 우리 자신들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형편을 몰라주신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자기들의 신이 자기들을 몰라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언부언합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되풀이하고 마치 한번 기도해서는 하나님이 못 들으시는 것처럼 생각해서 여러 번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하나님의 눈은 지금 우리 얼굴 앞에 다가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를 발견할 것이고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 의도까지 다 알아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 계십니다. 예수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결코 자신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하십니다. 이게 성령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가 앉고 일어서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계획하는 지 다 아십니다. 보고 계십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를 안보고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눈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오늘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더 알아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두루 찾으시는 하나님,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지 말게 하시고, 주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안 해주시는가 불안하지 말게 하시고, 다만 참된 예배자가 먼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옛날 다윗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예배자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구한 것을 주님이 아니 주셔도 또 우리가 주를 위해 큰 일을 못해내어도 낙심 말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며 노래하면서 주님 앞에 날마다 나아가는 예배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참된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심령에 진리를 말씀해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신 보좌를 믿음으로 바라보게 도와 주시옵소서.”
'내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강해(14)-하늘예배I (계4:8-10) (0) | 2012.03.03 |
---|---|
요한계시록 강해(13)-보좌 앞의 유리바다와 네 생물(계4:6,7)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11)-하늘에 베푼 보좌I (계4:2,3)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10)-하늘에 열린 문(계4:1)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9)-라오디게아 교회: 지워버리고 싶은 교회 (0) | 2012.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