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과학, 그리고 우주

예정과 선택

등불지기 2024. 8. 29. 16:24

 

 

예정과 선택

 

이제 가장 어려운 문제들 중 하나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것은 예정론(predestination)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고 말한다. 그 시점은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이다. 성경은 이에 관련하여 여러 번 말씀하고 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하였을 때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다윗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관하여 사도들이 여러 번 증언하고 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9-11)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예정하심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부 하나님은 누가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아신다. 하나님에게는 ‘불확정성’은 없다. 하나님 앞에는 모든 것이 확정된 상태인 것이다. ‘예지’와 ‘결정’의 주체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자도 성령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미리 아시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정론과 결정론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결정론적 사고방식에 빠지게 된다. 예정론은 알 수 있다고 말하고, 결정론은 모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정론은 도덕주의를 무너뜨린다.

 

그러면 예정의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를 부르시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방식은 말씀이다. 교회는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21)

 

자신이 전도하러 보낸 제자들이 돌아와서 그 결과를 보고할 때에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하나님만의 방식에 대해 알게 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5-27)

 

말씀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유일한 수단이므로 사도들의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하는 교회의 메시지에 예정하심을 입은 자들은 반드시 반응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예정교리는 구원의 확신 교리와 사실상 같은 것이다. 교회는 누가 예정하심을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한다. 복음을 듣지 못한 족속에게 다가가서 전해야 하며, 복음을 듣고 거부한 자들에게도 다시 한번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정된 자들은 반드시 복음을 듣고 반응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 ‘믿기로 예정된 자들’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은 불가지론을 이야기하는 결정론과 구별되어야 한다.

 

예정론을 이해하는 핵심은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라고 말하고 있다(엡 1:4). 우리는 시공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시공간에 갇힌 사람에게 시간은 어떻게 느껴지는가? 사람에게 ‘시간’은 언제나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흐른다. 그래서 미래를 예측할 뿐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 이렇게 시간을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셨다.”라고 하신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의 시간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려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창세 전에’ 택하셨다는 말씀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하나님께 어떤 것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먼저 물리학자들이 이해하는 시간을 보자. 과학자들에게 있어 시간은 공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시공간(space-time)은 중력(gravity)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중력은 질량(mass)과 관계가 있다. 즉, 질량이 생기는 곳에 중력이 발생하고 중력은 시공간의 곡률(curvature)을 만든다. 이 시공간의 곡률(굽은 정도)을 따라 시간도 다르게 흐르게 되고 심지어 빛조차 영향을 받게 된다. 2005년과 2015년에 나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그것에 관해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다. 모든 만물의 근원적인 에너지인 빛 자체는 아무런 질량이 없다. 그러나 그 빛은 질량을 부여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과학자들은 유럽입자가속기(CERN)에서 발견한 ‘힉스’(Higgs)라는 입자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질량이 생기면 시공간이 형성된다. 그래서 질량을 가진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셨으니 빛으로 만들어진 시공간 역시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이다. 따라서 시간은 하나님께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빛의 속도로 빨라지면 시간이 느려지다가 빛의 속도와 같아지면 시간이 정지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빛을 만드셨고, 빛 가운데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세계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사람이 보기에는 ‘과거’ 어느 시점에 ‘완료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언제나 ‘현재’이다. 하나님께는 사람의 모든 시간이 ‘현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창세전에 선택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은 그들의 행동 방식을 사전에 프로그래밍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모호한 것이 아니라 ‘결정된 상태’인 것이다.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과거도 하나님께는 현재이며, 사람에게 불확실한 미래도 하나님께는 ‘확실한 현재’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시간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2차원에 속한 개미가 3차원의 인간을 이해할 수 없듯이 시공간에 갇힌 인간이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를 온전히 알 수 없다.

 

성경은 누가 예정되었는지 또는 예정되지 않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지만 하나님의 예정의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 주고 있다. 그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이다(엡 1:4). 이것을 신학에서는 ‘구속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삼위 하나님의 합의가 있었다. 그 합의 안에는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분명한 명시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합의에 따라 본격적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마지막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합의에 따라 로고스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 가운데 오셨고 그 합의에 따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리고 그 합의에 따라 구원하기로 미리 작정된 자들을 부르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의롭다고 선언하심과 마침내 영화롭게 하심이라는 미래(인간이 보기에)에 이루어질 일들도 이미 완료형으로 포함되어 있다(롬8:30).

 

‘구원의 확신 교리’는 시간이 하나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게 될 때 따라오는 것이다. 예정론은 오늘 경험되는 하나님의 시간을 통해 미래 경험할 하나님의 시간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복음의 말씀으로 부르시고 그 말씀에 내가 믿음으로 반응을 하게 되어 하나님의 의롭다고 선언하신 은혜를 받게 된 사실을 사람의 시간대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대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구속언약 속에 나를 포함하셨다는 사실(과거)과 앞으로 우리가 경험하게 될 영광스러운 부활의 사건까지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확실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정론(predestination)은 이미 구원을 경험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고 고백할 수 있다. 따라서 예정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지 못했거나 하나님의 시간을 모르거나.

 

그러면 예정론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도 구원하기로 결정된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혹은 어떤 사람이 믿음 없이 살다가 그렇게 멸망한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은 그렇게 결정한 하나님 때문인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창세 전에 미리 정해 놓으셨다면 굳이 교회가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사를 파송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앞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대를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중력의 영향을 받으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살아가는 유한한 신체를 가진 상태로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선택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처럼 여기고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 비록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께는 ‘확정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오늘 우리가 선택하고 내린 결정과 행동이 곧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책임감 있는 삶을 방해하거나 무시하게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선한 삶의 동기가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은 우리의 미래 운명에 관하여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그때에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나를 복음의 말씀으로 부르시고 그 복음의 말씀에 내가 믿음으로 반응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안다. 하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때 잠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께 시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후회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실패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이 사실이라면 이미 나를 영화롭게 하신 일도 하나님께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구원은 그 무엇보다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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