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26)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들
본문:계9:1~12
9: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9:2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9: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9: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9: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9: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9: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9: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9:9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9: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9:11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9:12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지난 시간 우리는 천사장들의 나팔소리로 인하여 우주만물이 진동하며 떨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의 나팔소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앞으로 환경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환경이 점점 오염되고 환경질서가 붕괴됨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교회는 주님이 오심을 기억하고 각성해야 하며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의 마지막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또한 여전히 하나님의 진군소리인줄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세상을 향하여 복음으로 경고하여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 나팔소리는 오직 영으로 들립니다. 온 세상도 그 나팔소리에 진동하고 있는데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어두워져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경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나라의 위용을 만 천하에 드러내실 때는 이미 때는 늦습니다. 한번 문이 닫힌 후에는 다시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아직도 천사들의 나팔소리 때문에 떨고 있는 자연만물을 보면서 지체하지 말고 항복하고 주님께 나오라고 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 나팔소리에 진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환경문제를 잘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교회는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환경운동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가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장면은 천사들의 경고의 나팔로 인하여 자연계만이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조차 그 나팔소리에 떨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8장 13절에,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계시록 6장의 구조와 8, 9장의 구조를 서로 비교해보면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6장에서는 일곱 인이 떼어지는 장면을 봅니다. 자세히 보면 처음 네 가지 인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고 있고, 나머지 세 가지 인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땅에서의 장면이 하늘에서의 장면으로 이동합니다. 마찬가지로 8장과 9장을 자세히 보면, 처음 네 가지 나팔은 자연계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주고 있고, 나머지 세 나팔은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계의 진동에서 영적 세계의 진동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진군해오신다는 경고의 나팔소리에 자연계뿐만 아니라 영적 세계조차 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야단법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다섯 째 천사가 나팔을 불게 됨으로써 야기된 상황입니다.
다섯째 천사가 경고의 나팔을 불게 될 때 사도 요한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별은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은 타락한 천사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별이 상징적으로 사용될 때는 귀족이나, 존귀한 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천사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본문은 문맥상 ‘타락한 천사’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천사의 타락에 대해 자세히는 아니지만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타락은 인간의 창조 직후 그리고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게 된 인간에 대해 시기와 질투심으로 인해 하늘의 처소에서 자기들의 위치를 탈영하여 땅으로 내려와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놀라운 특권을 빼앗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 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동기가 바로 시기심과 교만에 있다는 사실을 에스겔서 28장에서 보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특권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뱀을 통해 침투해 들어온 사단의 거짓말에 그만 속아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을 넘어뜨린 것은 무력으로가 아닌 거짓말이었습니다. 마귀의 가장 큰 무기는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 탄로 나면 사단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을 속이고 지배해 온 사단의 교묘한 거짓말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아는 것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진리를 알지 못하도록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 째 나팔소리의 결과 영적 세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타락한 천사, 곧 마귀, 혹은 사단에 의해서 무저갱이 열려지게 됩니다. 빌립보 감옥에 지진이 일어나 진동함에 따라 옥문이 열리게 된 것처럼 나팔소리가 하도 우렁차서 무저갱의 입구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무저갱은 어떤 곳입니까?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어비스’(abyss)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원래 무저갱이란 말은 깊은 바다 속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감금당하는 곳으로 인식되었다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무저갱은 타락한 천사들 중의 일부를 가두어놓은 감옥으로 이해되어졌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같이 모음을 입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임이라.”(사24:21,22)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라고 했습니다. 거라사인의 땅에 군대귀신들은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도록 간구했다고 했습니다.(눅8:31) 분명 다수의 귀신들이 무저갱에 감금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나팔소리에 의한 진동으로 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조로, 본문에서 무저갱의 열쇠를 가졌다는 말은 무저갱에 갇힌 다른 악한 천사들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타락한 그 천사는 11절에 말씀하신 대로 무저갱의 사자요, 곧 사단인 것입니다. 참조로 말씀드리면 사단과 마귀는 같은 존재로서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를 가리킵니다. 사단과 마귀는 그 역할에 따라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단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는 데,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고 유혹하는 데 사용되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끌어내는 타락한 부하 천사들을 우리는 ‘귀신들’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귀신들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본문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중단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무시해서도 안 되며 그들을 지나치게 의식하여도 안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을 확실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천사들의 대부분을 무저갱에 감금하셨는데, 지금 그들이 풀려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마귀가 무저갱에 갇혀 있는 부하들을 끄집어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군해오신다는 경고의 소리에 누가 가장 먼저 야단법석을 떨고 있습니까? 사단과 그 부하들이 자기가 영원한 지옥 불못에 집어 던져질 때가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최후의 발악을 하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들이 먼저 야단법석을 떨면서 다섯째 천사장의 나팔소리에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사단의 치명적인 무기인 거짓말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그들을 무장해제 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결정적으로 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재앙인 것입니다. 지금 온 인류는 하나님의 진군나팔소리에 야단법석을 떨면서 발악하고 있는 귀신들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처절한 항전을 보면서 최후 승리의 날이 눈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의도하는 말씀입니다.
말세는 악한 영들이 날뛰는 때입니다. 성경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수가 하도 엄청나서 멀리서 보면 시커먼 연기로 보인 것입니다.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는 그들의 수가 실로 엄청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연기로 인하여 해와 공기가 어두워졌다고 한 것은 인간의 총명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리적으로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 대해 사람들의 총명이 점점 사라질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무저갱에 갇힌 귀신들의 떼가 출현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영적 진리에 대해 무지하게 될 것입니다. 귀신들이 횡포를 부림으로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고통을 당할까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무엇입니까? 말세에 버림받을 죄인들에게 임하는 고통은 그 마음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홍수 때 먹을 물은 귀한 것입니다. 요즘처럼 설교나 성경공부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넓어진 때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어 갈증을 겪는 때가 바로 이때인 것입니다. 그것은 원수 마귀와 귀신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점점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총명은 점점 사라져갈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사람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본문을 파고들며 본문과 씨름하는 것을 싫어할 것입니다. 좀 더 감각적이고 좀 더 실제적인 이야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교리보다는 간증을 더 좋아할 것입니다. 말씀을 연구하는 목사들이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교회는 본문을 가지고 씨름하는 것을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총명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깊이 파고들고 연구하고 깨닫고 적용하고 행한 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원수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우리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일에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9~12) 여러분,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힘들어하는 이유는 무저갱에서 올라온 귀신들의 패거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3~5) 아무리 환상을 보고 기막힌 체험을 하더라도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없다면 사단과 귀신들의 어두운 그늘 아래 놓여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없이 체험하는 것만큼 교회에 위협적인 사람은 또 없습니다. 누가 교회를 넘어뜨리는 사단의 참소에 도구로 전락하는가 하면 말씀에 대한 분별력이나 이해력이 없는 가운데 체험이나 느낌을 자랑하고 다니는 자들입니다.
요한은 멀리서 볼 때는 시커먼 연기가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 모양이 황충의 떼와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황충은 메뚜기입니다. 귀신들은 메뚜기 떼와 같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여덟 번째 재앙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메뚜기 떼의 출현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메뚜기 데가 휩쓸고 지나가면 모든 산천초목이 벌벌 떱니다. 모든 먹을 것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기근이 찾아옵니다. 산천초목이 벌거벗게 되면 홍수와 산사태로 이어집니다.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메뚜기 떼의 재앙은 고대 사람들에게는 매우 무서운 일이었던 것처럼 마지막 종말의 때에 사단과 귀신들의 떼거지 출현으로 말미암아 인생들에게 임할 고통을 본문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종말의 이 영적 재앙으로 말미암아 인생들에게 무서운 피해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같이 할지어다.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니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의 연고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르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요일1:8~12) 귀신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종말의 시대는 참된 인생의 기쁨이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고 사회는 점점 삭막한 곳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여러분, 귀신들, 혹은 악령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귀신을 믿습니까? 교회에 다니는 분들도 그런 것은 없다고 말들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악령은 분명 실재합니다. 악령의 실체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잘못이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무시해버리는 것도 사실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기 쉽습니다. 그들의 실체를 정직하게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영적 전쟁의 실태를 파악하십시오. 지금은 영적 전쟁의 때입니다. 마귀와 그의 부하들, 더러운 귀신들은 전갈과 같이 사람을 괴롭게 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분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대적하지 않으면 저들은 우리를 우습게 볼 것입니다. 저들이 여러분들을 만만하게 보지 않도록 담대함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영적 세계를 회피하거나 너무 단순화시켜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사단 마귀는 분명 존재합니다. 악령들은 지금도 메뚜기 떼처럼 온 세상에 활보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잃어버리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여러분을 결코 만만하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있어야 하되,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4절을 보십시오.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습니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문제 하나를 풀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귀신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성경이 명확하게 ‘NO’라고 대답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8:18) 그러나 여러분, 귀신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지 못한다고 해서 무작정 안심할 상황은 아닙니다. 요한 사도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5:19,20)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 사도가 권면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5:21)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결코 귀신들에게 사로잡히거나 귀신들리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방종과 방탕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거짓말을 하고 위협을 하는 등 나쁜 영향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을 것이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 요한이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에는 결코 귀신들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이미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견고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를 찾지 않고 땅엣 것을 추구한다면 귀신들은 우리를 소유하고 지배할 수는 없지만 우리를 조롱하며 갖고 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명예를 추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는 담대히 싸워나가야 합니다. 결코 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택함 받지 못한 인생들은 귀신들의 소유가 되어 처참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이 고통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죄인들이 겪는 고통입니다. 그 괴로움으로 인하여 인생들은 죽음의 공포를 체험합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삶의 고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 살아야 하는 아무런 삶의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그들은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로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자신들의 행복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삶의 목표이자 의미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린 자들이며,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주요 목자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베푸신 은혜로우신 일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알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세상에서 왕노릇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고통을 겪습니다. 그들은 내면의 공허함과 고독감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령들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선한 목자되신 구주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고 싶다’는 말을 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결코 삶의 행복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죄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고 싶다”는 말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현저하게 부인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을 믿는 자들이라면 결코 ‘죽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어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들의 죄와 허물로 인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맛본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죽고 싶다는 말처럼 그리스도인과 어울리지 않는 말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들이며(눅15장)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덤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제2의 인생으로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악령들의 모양에 대해 살펴봅시다. 본문 7절에서 10절까지 보실까요? “황충들의 모양은 첫 번째로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다고 했습니다. 귀신들은 빠르며 무서운 모양을 하고 있으며 호전적입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얼마나 호전적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온유입니다. 사나운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부드럽고 약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나 원수 마귀의 세력 앞에서는 결코 약한 자가 되지 마십시오. 담대하지 않으면 호전적인 그들은 우리를 아주 우습게 볼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다고 했습니다. 금 면류관은 존귀와 영광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존귀와 영광을 흉내 내지만 모조품일 뿐입니다. 지난 겨울 인도에 단기선교를 다닐 때 인도에 가는 곳마다 우상들이 가득 찬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들 얼마나 화려한 화장과 의상들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화려하게 꾸며도 그것은 진정한 존귀와 영광은 아닙니다. 귀신들의 특징은 화려함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존귀를 모방합니다만 결코 참된 존귀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도 대부분 화려함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화려한 옷과 화장에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모조품입니다. 참된 영광과 참된 존귀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셋째로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얼굴 같다는 말은 인격과 지혜를 흉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인격을 흉내 냅니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사람의 말을 합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혼령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다가오는 그들에게 속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단지 그들은 타락한 천사들이요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무저갱에 가두어둔 자들입니다. 이제 그들이 다섯째 천사장의 나팔소리에 무저갱이 진동하자 잠시 풀려 나와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매혹적이란 뜻도 되고 종교적인 뜻도 됩니다. 귀신들은 자신을 매혹적인 모습으로 감추어서 사람들에게 접근합니다.
다섯째로, 그 이는 사자의 이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귀신들의 탐욕과 권세를 말합니다. 한번 물리면 좀처럼 풀지 못하는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삼키려고 합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집어삼키려고 달려듭니다. 겉으로는 사람의 모양으로 다가오지만, 긴 머리털을 가지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일단 잡히면 온 영혼이 으스러질 정도로 강력한 입에 물리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뻔뻔하며 그들은 좀처럼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일곱째로, 그들은 날개들의 소리가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다고 했습니다.(9절) 그들은 매우 위협적으로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그 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도망칩니다.
여덟째로, 그들은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다고 했습니다. 귀신들은 영혼의 독을 내뿜고 있습니다. 일단 그 독이 퍼지면 좀처럼 치유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독은 치명적이지만 제한적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이 무한대로 권세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셨습니다.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10절) 여기서 특별히 다섯 달이란 기간이 언급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유대인들에게 다섯 달은 하나님께서 홍수로 땅을 심판하실 때 물이 온 지구상을 뒤덮은 기간입니다.(창7:24절 참조) 그러니까 온 세상이 귀신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며, 어둠의 공격에 온 세상이 저 옛날 홍수와 같이 가득 뒤덮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아무리 사납게 날뛰어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활동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그들은 아무 힘도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힘과 권세를 제한하셨습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이 인치신 자녀들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부터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그러므로 마귀가 아니라 살아 계신 만군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매우 끔찍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진군하신다는 경고의 나팔소리가 다섯 번째로 울려 퍼질 때 온 우주만물뿐만 아니라 이제는 영적인 세계에서도 진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섯 째 나팔소리에 무저갱이 진동하고 열릴 정도입니다. 잡혀 있던 타락한 천사들이 아볼루온, 즉 마귀의 지도 아래 풀려 나와서 마구 활동하면서 하나님의 인 맞지 않은 사람들을 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극히 단순한 사실 하나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버린 모든 사람들은 귀신들에 의해서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롬2:9)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또한 말했습니다.(딤후3:1) 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라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고통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 겪는 고통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고통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를 때 받는 고통입니다.(엡2:2)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안식과 평강이 없이 때문에 겪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의 자녀라면, 위로부터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성령으로 새롭게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면, 악한 자가 도무지 여러분을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약하지만 우리 주님은 강하시며 선한 목자가 되셔서 늘 함께 하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지켜주신다고 안심하는 것과 방심하는 것은 다릅니다. 불안에 떨 필요는 없지만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말씀에 항상 바로 서 있지 않으면 마귀는 늘 우리를 우습게 보고서 졸개들을 보내어서 집적대고 미혹하며 실패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실패할 수는 있어도 영원히 패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실패하면서 살아가지 않도록 늘 깨어서 영적 전쟁의 상황을 직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군사로 강하고 담대하게 전진하는 것은 군사된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영적 전쟁의 때임을 잊지 마십시오. 마귀와 악령들은 자기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 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사들의 나팔소리를 우리보다 더 잘 듣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나팔소리에 그들은 벌벌 떨고서 최후의 발악을 벌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결정적인 싸움은 끝났지만 패잔병들은 아직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외치면서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패배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최후 발악에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워해서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뒤로 물러서지 말고 담대히 맞서십시오. 여러분이 담대함을 잃지 않으면 적들은 지레 포기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담대함을 잃지 마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큰상을 얻는 비결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함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가슴을 펴시고 전진하십시오. 그러면 적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시온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 어떤 협곡을 지나는데 좌우에 무서운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무서워서 다시 되돌아 가버리는데 주인공인 기독도는 자세히 보니까 사자들이 사실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서웠지만 그 사이를 담대하게 헤치고 지나가게 되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적은 사실 우리 안에 있습니다. 원수 마귀를 무서워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무서워해야 할 것은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무서워하는 마음입니다. 내 안에 이러한 두려움이 혹 있습니까? 모든 종류의 두려움과 무서움은 사단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큰 소리로 올테면 와보라고 외치면서 가슴을 쭉 펴십시오. 담대하십시오. 여러분의 뒤에 우리 대장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여러분이 담대하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싸우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서움을 극복하고 담대함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담대함을 갖습니까? 진리를 알고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알고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우리 안에 일말의 사랑이라고 있다면 우리는 정말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미움과 증오는 스스로 두려움의 영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진리에 대한 진실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담대함을 갖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담대함을 갖는 비결입니다. 내 힘으로 마귀를 물리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의지로 마귀와 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가 되십시오.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도록 하는 것이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진정한 비결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6-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8,9)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2,13) 우리가 담대함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의 목자요, 우리의 대장이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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