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34)-바다와 땅에서 올라 온 두 짐승(계13:1-18)

등불지기 2012. 3. 3. 18:44

우리가 싸워야 할 두 마리 거대한 beast가 있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34)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두 짐승

 

본문: 계13:1-18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13: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3: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3: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3: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3: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3: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육이니라

 

우리가 계속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영적 전쟁에 대한 것입니다. 사단은 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을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뜻대로 잘 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자 사단은 유대인을 핍박하게 되는데 그것도 제대로 되지 않게 되자 이제는 ‘여자의 남은 자손’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싸움의 칼을 빼어들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계시록 12장 끝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세상에서부터 구원받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전쟁을 벌이고자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홍해바다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과 같이 세상바다에서 구원받은 새이스라엘은 이제 자신을 향해 적대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사단의 세력과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이 전쟁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지속되지 않고 오히려 계속되는 시험과 시련과 맞서 싸워나가야 했던 옛날 광야 이스라엘과 똑같이 오늘 우리들 역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달려드는 원수들의 계략과 계속 맞서 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계시록 13장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교회를 향해 적대감을 품고 있는 사단이 어떤 전략 전술을 가지고 공격해올 것인가에 대해 보게 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계시록 12장과 13장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12장에 등장한 용이 어떻게 그 분노심을 표현하는가에 대해서 13장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단 마귀는 어떤 모습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해올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13장을 전체적으로 볼 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10절까지는 바다에서 한 짐승이 출현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11절에서 18절까지는 땅에서 또 다른 한 짐승이 출현하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마귀의 기본적인 전략과 전술에 대한 것입니다. 용은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고서 바다 모래 위에 서서 바다에서 구원을 받고 무사히 빠져 나오는 성도들과 최후의 결사항전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13장에서 보고 있는 두 종류의 짐승은 사단이 사용하는 하수인들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귀가 직접 그 모양을 드러내고 우리를 공격하는 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는 굉장히 똑똑한데 만일 그렇게 하면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게 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결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귀가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지 잘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1,2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바다’란 이미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다는 늘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인간세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사57:20)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땅을 물위에 세우신 것을 봅니다.(창1장) 시편에서도 세상을 바다로 비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다는 인간세상의 변화무쌍하고 변덕스럽고 안정되지 못하고 일시적이요 늘 자주 바뀌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바다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계시록 21:1에 보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세상에서는 “바다가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2:15-17절을 읽어보십시오.) 그런데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짐승에 대한 이미지는 다니엘서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짐승은 세상 나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를 짐승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여기 바다에서 출현하는 한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나라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짐승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이 짐승의 모습은 앞서 등장한 붉은 용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다시 말해서 용은 자신을 닮은 짐승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워서 교회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세상나라는 통치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전능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자만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뿔은 보좌와 권세를, 머리는 주권자를, 면류관은 부귀영화를 각각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머리들에 참람된 이름들이 있다는 말은 세상나라의 주권자들이 스스로를 신격화하며 신성을 모독하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격화 내지는 신격화를 부추기는 호칭사용은 로마제국시대뿐만 아니라 요즘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짐승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2절) 이것은 세상나라의 짐승과 같은 본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독특한 해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약에서 이미 그렇게 말해오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없는 상태를 짐승이라고 서슴지 않고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세상나라에 대해서도 여러 종류의 짐승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다니엘 7장을 보십시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다니엘이 보았던 세상 나라의 모든 특성이 다 포함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해야 할 세상나라는 구약에서 다니엘 선지자가 경험한 그런 세상나라보다 더 복잡하고 혼합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참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상태는 마치 짐승과 같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세상나라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용은 세상나라를 통해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다는 말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유혹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 권세를 나타낼까요? 본문을 주목해보십시오.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된 상처가 나으매 온 세상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2-4절) 세상나라의 주권자는 사단으로부터 메시아를 흉내낼 수 있는 권세를 받습니다. 그 주권자는 메시아로 숭배 받을만한 카리스마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머리가 왜 상하게 되었을까요? 사실 그것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세에 의해 부서진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납니다. 용이 그에게 그런 권세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사를 통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세계사는 자신이 메시아로 착각한 수많은 통치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나라의 권력자로서 대단한 카리스마, 신비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경배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고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사람들은 그가 가진 카리스마와 절대권력 앞에 흥분하며 경외심을 품습니다. 제가 작년에 중국을 다녀왔을 때 이러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절대권력 앞에 도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백성들의 메시아로 자처하는 주권자들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용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심과 경외심을 얻어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용이 또한 흉내내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것을 보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적 그리스도의 정체를 봅니다. 용이 어떻게 교회를 대적하는지 그 전략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용은 자칭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권력자를 내세워서 성도들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가 아무리 대단한 카리스마와 신비한 절대 권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용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숭배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권력자이며, 스스로 메시아라고 자부하고 있으며, 주위에서도 메시아로 추앙하고 있지만 결코 우리가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사실 적그리스도가 소유한 권세는 용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2절, 4절, 5절, 그리고 7절을 보십시오.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도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우리는 세상나라의 통치자가 가진 절대 권력이 용에게서 받은 것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절대권력 앞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절대 권력은 언제나 사단의 하수인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교회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게 됩니다. 독일 히틀러 치하에 독일 국교회가 2차 세계대전을 ‘성전’(holy war)이라고 옹호하는 설교를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절대 권력과 투쟁하여 순교하게 된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님과 같이 저항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꼭 한번 본 회퍼 목사님의 전기를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그는 절대권력 배후에 있는 악의 세력을 잘 보았던 인물입니다.

여러분, 이 짐승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5, 6절에,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훼방한다는 말은 악의에 찬 말로 비방하며 비웃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교만한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을 비방하는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가 ‘큰 말’을 가졌다는 것은 언변력과 발언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말을 크게 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큰 말’을 하는 사람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또 ‘참람된 말’이란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격화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격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신성을 모독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들의 이름들은 거의 다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을 보십시오. 그가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하는 말들을 보십시오. 그러면 충분히 이해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권세는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내 끝장 날 것입니다.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활동하는 것은 42달간입니다. 성경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 그리고 42달, 그리고 1260일은 모두 같은 기간이지만 그 뉘앙스에 있어서 다릅니다. 주님의 결정적인 개입으로 역사가 끝을 맺기까지는 때가 걸리는데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42달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구주께서 재림하시면 끝장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권세가 오래갈 줄로 착각하고 마구 훼방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를 훼방합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말을 함부로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권세와 권력과 지위를 믿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로를 주의 깊게 보십시오. 결코 행복한 말로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종말은 참으로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잠시 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7,8절) 짐승은 성도들이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잠시 잡아 가두고 때로는 죽일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말세에 겪어야 할 필연적인 고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기에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신격화하는 사람이 권력을 잡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은 이 절대권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기 때문에 결코 무릎을 꿇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나타내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와 믿음은 함께 가는 동역자요 친구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9,10절)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인내를 이루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참고 또 참고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할 때 성도들은 믿음과 인내를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인내해야 합니까? 사로잡는 자가 사로잡히고, 칼로 죽이는 자가 칼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을 알 때 우리는 그들의 신격화에 현혹당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절대 권력을 가진 주권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이 악한 때에 참고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짐승의 출현합니다. 그런데 그 모양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해오는 용의 전술을 볼 것입니다. 자,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이 짐승의 모양은 무섭게 생긴 것이 아니라 새끼 양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짐승 역시 적그리스도의 또 다른 모양으로서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있습니다. 그는 양의 옷을 입었지만 속으로는 약탈하는 야수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다에서 출현한 짐승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흉내 내고 있다면, 여기 땅에서 출현한 짐승은 그리스도의 선지자직과 제사장직을 흉내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선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있습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구분하기 위해서 본문은 단지 ‘새끼 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귀는 모방의 귀재입니다. 첫 짐승은 매우 흉악하게 생겼지만 두 번째 짐승은 매우 유순하게 생겼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강온전략을 잘 구사합니다. 마귀는 처음에는 강하게 밀어붙이다가 잘 되지 않으면 부드럽게 다가옵니다. 많은 교회들이 환난과 핍박 속에서는 꿋꿋이 신앙을 잘 지키다가 물질과 번영 속에서는 그만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역사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언제나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양의 탈을 쓰고 교회에 접근하여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성도들은 마귀의 이러한 강온 전술에 휘말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새끼양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이 짐승은 바로 ‘거짓선지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겉으론 양의 탈을 쓰고 있지만 속으로는 노략질하는 이리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미리 잘 말씀하셨습니다. 그 특징이 무엇일까요? 첫째,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보다는 사람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것은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능력이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있는 것 같아도 성령의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넷째, 기도는 많이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뜻은 결코 구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선지자 노릇하지만 선지자로서 섬기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직분과 직함에 관심이 많지만 결코 섬기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섯째,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정도로 카리스마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줄 아는 겸손함과 진지함은 없습니다. 일곱째, 주의 이름으로 특별한 체험이나 간증을 가지고 있어도 결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바로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왜냐면 양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양의 무리 가운데 끼여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대신 잘 믿는 사람들을 노립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선지자로 부르지 않으셨지만 그들 스스로 선지자 노릇을 하기 때문에 ‘불법을 행하는 자’인 것입니다. 이상이 거짓 선지자들의 특성에 대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7:15절에서 23절까지 깊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특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가지고 비유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위기의 때에 도망 가버립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힐 때 자신의 본색이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말씀을 즐거워하거나 묵상하는 것이 없고 말씀에 뿌리를 두지 않기 때문에 시련이나 시험이 찾아오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배움으로써 가능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의 영을 받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자,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이 짐승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봅시다.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고 했습니다. 두 뿔이 있다는 것은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며, “용처럼 말하더라”는 것은 겉모양(경건의 모양)과 달리 그 말이 그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권세가 있는 것 같지만 결코 그 말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진리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용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성경적이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얼마나 성경의 권위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를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결코 겉모양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에만 속지 말아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카리스마적인 모습, 체험, 간증, 외모 등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흉내를 잘 내어도 결국 용처럼 말을 한다면 그는 교회를 노략질하는 거짓 선지자일 뿐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무서운 권력의 모습으로 핍박하기도 하지만 매우 은밀하고 교묘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하기도 합니다. 바다에서 나오는 자는 보기만 해도 무섭지만 땅에서 나오는 자는 언뜻 보기에 참으로 온순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실제로 많은 택함 받은 사람들이 마귀의 이 전략에 당했고 지금도 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세상에서 비방을 당하는 것은 바로 이들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의 활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 첫 번째 짐승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을 경배하도록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보십시오.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 앞에서 이적을 행합니다. 분명 어용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짓 선지자는 절대 권력자의 권세를 대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신자들로 하여금 그를 경배하게 가르칩니다. 어떤 이적을 행합니까?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13,14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택하신 자들도 미혹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24)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2:9,10) “저런 사람들은 거짓의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로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15)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계19:20)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절대 권력에 유착되어 있는지를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용선지자로서 절대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입니다. 언제나 절대 권력은 자신들의 신격화를 부추기는 어용 선지자들을 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가 그러했고, 아합과 이세벨이 그러했으며, 본문에 나오는 첫째 짐승 또한 둘째 짐승과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둘째 짐승, 다시 말해서 거짓 선지자들의 계략은 무엇입니까? 다시 성경을 봅시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3-15절) 첫째로, 거짓 선지자들은 신비한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놀라운 속임수를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놀라운 체험과 이적을 보일 수 있는 속임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적을 보임으로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세를 살면서 표적주의 신앙을 주의해야 합니다. 표적을 추구하는 것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특징입니다. 제가 표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모든 표적을 다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표적은 언제나 참된 말씀 순종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하셨고, 제자들 역시 주님의 말씀대로 “나가서 두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할 때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16:20)고 했습니다. 참된 표적은 말씀에 따르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추구하지 않고 표적 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특징은 말씀보다는 표적을 더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주의 신앙은 나중에 더 악화될 것이라고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가서 전보다 더 악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더 악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직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는 줄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은혜의 모조품에 속지 마십시오. 거짓 치유, 거짓 환상, 거짓 체험, 거짓 이적, 거짓 변화, 거짓 교리들, 등등에 속지 마십시오. 오직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오직 성경으로 돌아오십시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중심을 굳게 붙잡아 줄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바알 선지자들에게 미혹 당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바로 알아야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거짓 선지자들은 인간숭배를 가르칩니다.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의 특징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또 굉장한 권위주의자입니다. 여러분, 어떤 모임이든 교주화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한 개인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모임을 조심하십시오. 참된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고 진실하게 영혼들을 섬기는 데서 주어집니다. 참 권위는 섬김입니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입니다. 권위주의가 무엇입니까? 직함과 직분과 혹은 각종 이적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사람들을 부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마구 통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마구 명령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은혜스럽다고 느낄지라도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주님의 뜻도 방식도 아닙니다. 섬기는 일보다는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추구하거나 권력을 남용하여 사람들을 마구 후리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은 첫째 짐승의 우상으로 하여금 말하게도 합니다. 절대 권력자의 카리스마를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은 다 죽이게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육체는 죽일 수 있으나 결코 영혼은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마10:28)

셋째로, 거짓 선지자들은 감히 하나님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세요.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이마에 표시를 하는 것은 소유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처음 계시록 7장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이마에 인침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처럼 짐승의 표를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 이 표시는 소유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이비나 이단 집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교주가 있어서 교주가 교인들을 자기 것으로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을 저의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의 소유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누구의 것이라고 자신을 속박하지 마십시오. 혹은 여러분 자신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을 삼가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것도 아닐뿐더러 그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을 사유화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하십시오. 사람의 소유가 되지 마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은 특정 계층만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소유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과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과 짐승을 섬기는 자들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둘 중에 반드시 어느 하나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든가 아니면 짐승을 섬기는 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람들에게 주는 짐승의 표는 무슨 뜻입니까? 컴퓨터 바코드인가? 이 숫자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의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17절에,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표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은 본문을 자세히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표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물리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코드명J]를 떠올리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이마에 인치는 표가 보이는 형태가 아닌 것처럼 짐승의 표 역시 보이는 어떤 형태가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42달의 기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으로 설정할 때 더욱 그 의미는 상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늘에 시민권을 가지지 않는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짐승에게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계시록 14:9에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이라고 했습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 즉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주되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절대 권력을 인정하고 숭배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는 말은 성경이 기록된 당시 고대 세계는 우리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때 당시에는 각각의 알파벳이 고유한 수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18절에,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고 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등 고대문자는 숫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수를 헤어보라는 말은 그 이름을 잘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은 인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라면 그 이름을 주목하고서 그가 아무리 자신을 신격화할지라도 그가 단지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이요, 흙으로 돌아갈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이름이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새겨진다는 말은 그 생활과 그 생각에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과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사람을 숭배하고 사람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를 세어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그 수는 사람의 수”라고 했습니다. 즉, 무슨 말입니까? 단지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수’라는 말은 ‘하나님의 수’와 달리 불완전한 것입니다. 6은 7에 비해서 불완전한 수입니다. 그가 스스로 신격화하며 스스로 절대 권력을 믿고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말할지 몰라도 그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 그 오른손이나 그 이마에 이런 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 불과하여 매우 불완전한 존재로서 짐승의 소유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이 숫자놀음에 빠지지 말도록 합시다. 이 숫자를 가지고 특정 인물을 찾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도록 합시다. 다만 ‘사람의 수’ 즉 불완전한 존재임을 분명히 직시합시다. 짐승에 경배하는 자들은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짐승의 이름으로 자기 정체성을 삼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짐승에게 속하여 짐승을 섬기는 자로 구분됩니다. 이 두 부류 사이에 중간지대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와 어둠의 나라에 비무장지대는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살아갈 때 한 가지 각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심각할 정도의 경제적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매를 못하게 하니”란 말은 세상에서 같은 정서를 가지지 않은 자들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앞서 주님의 길을 걸어갔던 선배들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손해를 겪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족장들을 보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10:33-36)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 때 경제적 손해를 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적대시하는 원수 마귀가 어떤 전략과 전술로 공격해오는 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용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을 내세워서 우리를 위협하거나 혹은 미혹하려고 합니다. 그들의 전술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어 담대히 원수를 대적하는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일깨우셔서 이 큰 전쟁의 날에 승리의 발걸음을 옮기도록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