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information, 지식knowledge, 그리고 지혜wisdom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지식도 지혜도 아닌 정보인 것입니다.
옛날 유명한 장학퀴즈프로그램이나 골든벨 같은 프로그램이 단적인 예입니다.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를 가지고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느냐 못하느냐를 결정짓는 것이 한국의 교육현실입니다.
이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현실입니다.
그러면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는걸까요?
비행기나 자동차로 설명하자면,
비행기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정보입니다.
비행기를 만드는 능력은 지식입니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세상의 학교는 정보를 주되 지식과 지혜는 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참된 지식공부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풍랑 속에서 참된 지혜공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했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공부는 이제 시작이니까요..
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했다고 사회에서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비행기에 대한 여러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서 비행기를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모험과 실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실패와 시련 속에서 참 지식과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학교 졸업식을 시작식commencement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 제 22 장 >
※지혜자는 계속해서 두 가지 길을 그려주면서 지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닫기를 바란다. 우리는 잠언의 말씀을 읽으면서 두 인생을 보면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진지하게 점검해보아야 한다. 잠언은 우리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는 것이 진정한 목표가 아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주며, 하나님을 향한 인생들의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어준다. 결국 잠언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태도를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태도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v.1- 많은 재물보다 명예(이름)를 택하라. 그리고 은이나 금보다 은총(은혜)를 더욱 택하라. 이 논리는 재물보다는 명예가 낫고, 명예보다는 은총이 더욱 낫다는 논리이다. 세상에는 3종류의 인간이 살고 있다: 재물을 위해 사는 인생, 명예를 위해 사는 인생, 그리고 은총을 위해(의해) 사는 인생.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이 세 가지 모두를 다 주신다.(4절 참조)
v.2- 가난한 자와 부한 자 모두 하나님이 지으셨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말고, 부자를 시기하지 말라. 빈자 멸시함이나 부자 시기함이나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죄의 증상이다. 그들 모두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교리가 승리하는 삶의 기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v.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재앙을 보면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남이 재앙을 만날 때 속으로 은근히 기뻐한다. 라이벌이 잘못될 때 기뻐하는 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하는 자는 친구나 이웃이 잘못될 때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함께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기뻐하다가 해를 당한다. 21:10을 참조하라. 그리고 갈6:1,2을 보라. 예수님은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했고,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어라고 하셨다.
v.4-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깊이 낮추는 것(=겸손)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경외함)에 주어지는 상급은 재물, 영광, 그리고 생명이다. 1절에서 ‘재물’ ‘명예’ 그리고 ‘은총’과 같은 의미다.
v.5- 패역한 자가 누군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사리사욕을 위해 생명(은총)을 경시하는 자, 에서와 같이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넘기는 자가 아닌가?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자는 생명길을 향해 형통하게 전전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가시밭의 비유’를 보라. 우리 안에 있는 패역함(정욕과 개인적인 이익추구를 위해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가? 그러나 자신의 영혼을 정녕 지키고자 한다면 자신이 시온성을 향해 가는 길에 가시와 올무를 치우게 될 것이다. 그 마음에 시온을 향한 대로가 있는 인생이 얼마나 복된가!
v.6- 그러므로 ‘마땅히 행할 길’을 어리석은 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어린 아이에게 일찍부터 가르친 훈계의 말씀은 늙어서도 그를 떠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복음의 길을 가르쳐야 한다. 순례의 길을 가르쳐야 한다. 천로역정을 읽게 해야 한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좋은 보약은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v.7- 이것도 비유이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종’은 위임을 맡은 자를 의미하지만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빚진 자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주관을 받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원한다면 그의 빚진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이 되는가가 무엇을 하는가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기록된 본 절은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인생이 되었는가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v.8- 악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가?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은 ‘악을 심는 행위’이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은 영적 추수의 법칙을 말한다.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두리라”(갈6장) 악을 심으면 재앙을 거둘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그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악을 뿌릴 때 얼마나 기세 등등할까? 그러나 그 기세는 꺽이고야 말 것이다.
v.9- 선한 눈이 무엇인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눈이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눈’이다. 하나님이 빈자를 지으셨기 때문에 빈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이 선하게 보신다. 고넬료의 경우를 보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꾸이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흩어 구제하는 것은 의리이다. 형제를 물질로 섬기는 것은 임금의 우편에 서게 될 양들이 할 일이 아닌가?
v.10- 거만한 자가 누군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하나님으로 만족하기 싫어하는 자, 하나님 이외의 것에 만족하는 자, 자신과 자신의 한 일에 만족감을 얻는 자, 그가 거만한 자의 진정한 개념이다. 이러한 거만함 때문에 다툼이 쉬지 않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다툼을 그치려면 거만을 징계해야 한다. 거만한 마음이 징계받지 않고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없다.
v.11-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예수님의 말씀은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역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가 되게 한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는 그 입술에 덕이 있다. 그는 결코 패역하고 악한 말을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 마음에 쌓은 악에서 악을 내기 때문이다. 마음이 정결한 자의 입술에는 악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 오직 정결한 자에게 임금이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어질 것이다.
v.12-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눈으로 지키신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지키신다. 그러나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자의 말은 이루지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역사와 인간들의 삶을 통치하고 계신다. 정욕을 위해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물리치시며, 사리사욕을 위해 일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 마음 속에 진정한 안식과 만족이 없게 만드심으로써 지금도 살아계시는 하나님 자신을 증거하신다.
v.13- 게으른 자는 엄살이 심하다. 기도할 줄 알면서도 왜 기도하지 않는가? 기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는데도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엄살이 심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면 어떻게 될 것인양 엄살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초청에 즉각적으로 임하며, 천국을 침노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장가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밭에서 일도 해야 한다는 ‘엄살’ 때문이다. 영적으로 나태한 자는 상황을 과장하면서 자기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v.14-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다. 그 함정에 누가 빠지는가? 여호와의 진노를 당한 인생이 그 구명에 빠지게 될 것이다.
v.15-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어리석은 자(죄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자, 롬 3:23참조)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어리석은 존재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기 때문에 징계하는 채찍이 미련함을 멀리 쫓아낸다는 말씀은 단순한 자녀교육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인 삶, 구원의 삶에 적용되는 말씀이다. 복음의 말씀은 하나님의 강력한 징계의 채찍과 같은 말씀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죄인(어리석은 자)이라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미련함(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을 복음의 말씀으로 경계하지 않으면 미련함을 다스릴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 시급히 회복되어져야 할 것은 바로 복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징계하심과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더 많이 징계와 연단을 받아야 한다. 이 복음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 사용될 수 없다.
v.16- 재리, 사리, 불로소득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이나 부자에게 그것을 뇌물로 주는 행위는 모두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그는 진정한 영적 부요함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v.17-21: 가르침의 목적
지금까지(10:1~22:16) 솔로몬은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길과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길, 지혜의 길과 미련한 자의 길, 죄의 길과 의의 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등. 두 가지 인생길을 보여주면서 지혜가 무엇인지 확연하게 보여 주어왔다. 이제 지혜의 교사는 다시 한번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라.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라
네 입술에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우리는 다시 한번 더 참된 경건, 기독교적인 영성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보게 된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태도에 나타나 있다. 진리에 대한 피상성과 조급성은 경건에 매우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보라. 그들이 고민하고 자기 주장이 강할지라도 진리에 대해 인내심이 없다면 그 조급함이 자기 영혼을 망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민하던 여호수아에게 내리신 말씀도 역시 율법의 말씀에 대한 진지함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진지하게 듣고자 하는 자는 자기 생명을 구원할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지혜의 스승은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지혜를 가르친 목적을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내가 너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v.19)
잠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잠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파악하게 된다. 이 묵상의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힘(믿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즉, 성경은 특별계시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한다.(v.20)
(2)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v.21)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 편지를 보내는 목적이 ‘이 일의 확실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진리라는 말 그 자체의 개념을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를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구원의 사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사건 그 자체를 아는 것이다. about의 지식이 아니라, of의 지식이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아는가? 당신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확실히 아는가?
(3)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v.21)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교사는 제자들에게 항상 질문을 던짐으로서 제자들이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심으로써 진리를 파악하고 있는 정도를 알고자 하셨다. 질문하는 능력은 스승의 능력이고, 대답하는 능력은 제자의 능력이다.
●v.22-29: 지혜자의 설교
(1)의리의 문제: 약한 자와 곤고한 자를 압제하지 말라. 약한 자의 편에 서라. (v.22,23)
왜냐면(대저), 하나님은 신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약한 자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고와와 과부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사귐의 문제: 노를 품는 자와 울분자와 사귀지 말라.(v.24,25)
왜냐면 그 행위를 본받아서 영혼을 올무에 빠뜨리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지혜는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신중함을 소심함으로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혜다.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노를 품고, 울분을 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와 사귀지 말아야 한다.
(3)사귐의 문제(II): 동역과 보증의 문제(v.26,27)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라는 말씀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더불어 손을 잡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에게 보증을 서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을 믿는 자는 항상 손해볼 각오를 해야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성경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네가 어찌 그리 하겠느냐?” 손해볼 일을 왜 하려고 하는가?
(4)사업의 문제(v.28,29)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는 행위가 무엇인가? 땅을 분배받았을 때 서로의 땅을 구분하기 위해 경계를 표시하는 돌을 세웠다. 그 돌을 옮기는 행위는 무엇인가? (1)자기 땅을 넓히려는 탐욕 (2)거짓으로 땅을 넓히려는 행위 (3)의의 기업을 부정하는 불신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집중해야 한다. 교회는 사도적 복음에 충실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복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저주를 자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이 되어라. 자기에게 주어진 기업(땅, 사업)에 충실하라. ‘기업’ 혹은 ‘사업’은 의의 땅을 말한다. 의에 충성된 자가 땅에 거할 것이며, 의를 저버리는 자는 땅에서 추방될 것이다. 자기 사업을 오늘날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교회로 말하자면, 사도적 복음에 충실하도록 하라. 그리스도인으로 말하자면, 자기 영혼의 구원사업에 충실하라. 자신의 영혼구원에 충실한 자는 의의 지계석을 옮기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