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상담

청년들과 함께 했던 모든 상담 I

등불지기 2012. 3. 5. 15:37

제가 교육전도사로 고등부 사역을 시작했던 것이 1989년이고, 청년부 전임 교역자를 시작한 것이 1995년이었습니다.

선교지에 나온지도 여러 해 되었는데 지금도 고민하는 청년들이 저희 집에 찾아옵니다.

청년들이 얼마나 고민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동안 청년들과 함께 하면서 나누었던 말씀들, 주로 인터넷에서 올린 질문에 제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올린 글이 많은데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지요^^

혹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동안 모아왔던 상담내용을 한꺼번에 올려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변: 사실 가장 중요한 물음인 것 같아요. 사실 목적 없이 공부하는 사람이 많고 또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참 많아요. 또 남에게 지기 싫어해서 공부하는 사람도 많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한번쯤 그런 것에 회의를 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군요. 먼저 목적을 세우고 공부하십시오. 만약 목적이 뚜렷하지 않는다면 공부하지 말고 그 목적을 찾는 공부를 하십시오. 그리고 공부해야 하는 목적을 정했으면 남을 따라서 하지 말고 창조적으로 하십시오. 인생은 어차피 평생 공부해야 하는 과정이니까요. 저의 학창 시절을 얘기해드릴까요? 저는 어릴 적 공부 잘 한다는 칭찬을 좀 들었습니다. (후훗, 이건 제 생각이에요) 저는 남에게 지기 싫어서 열심히 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중2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저는 공부할 이유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왜냐면 친구들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공부는 안하고 성경만 보곤 했답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많이 화가 나셨죠. 하지만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무작정 공부하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저는 드디어 공부할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소박하면서도 거창한 것인데, 다름 아니라 어차피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내 인생을 걸었다면 이왕 공부할 바에 영어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 보자고 결심하게 된 것이죠. 이런 생각을 하니까 의욕이 왕성하게 생기게 된겁니다. 그래서 가장 싫었던 과목이 영어이었는데 저는 그 생각을 한 이후부터 영어과목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그래서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거의 영어만 공부했습니다. 엣센스 사전을 통채로 외우기도 하고 "바퀴벌레"(?)나 "토플"이나 닥치는 대로 공부했습니다.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내가 공부해서 영어로 설교하고 영어로 복음을 전하는 제 자신을 생각하면 흥분되었지요. 그래서 다른 과목은 별로 공부를 안했답니다. 자연히 성적은 형편 없었지요. 그래도 개의치 않았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어과목이 되니까 나중에 다른 과목도 대충 따라오더라고요. 음...제가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저는 새로운 흥분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애요. 아마도 생물이나 물리를 공부하면서 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국어를 공부하면서 저는 아름다운 시집을 한 권 내고 싶습니다. 저는 영어뿐만 아니라 일어 독어 스페인어도 공부할 것입니다. "내가 이 공부를 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앞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실 때를 위해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준비시킬 것인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지식이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공부하면 어떨까요? 만약 이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거나, 공부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억지로 공부하지 마십시오. 억지로 학교 다니지 마십시오. 대신 그 시간을 그리스도를 배우는데 집중 투자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부르심의 목적을 아는데 최우선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진정 그리스도를 사랑하신다면, 그분을 영화롭게 해드리고 싶으시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준비할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신 자는 부르시는 목적, 즉 비전을 함께 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부르심의 목적, 비전을 위해 당신이 준비해야 합니다.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해 준비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면 열심히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공부하는 것도 예배의 일부분이 됩니다. 당신의 공부가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공부하는 것이 신날 것입니다. 결코, 공부는 신앙과 분리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와 학교는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르심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필요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배움의 과정은 평생 지속되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계속 배움의 갈증을 느끼고 있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서점에 들러서 내가 공부할 부분이 무엇인가 찾아봅니다. 저는 배움의 갈증이 제가 성장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고 확신합니다. 배움의 갈증은 당신에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배울 것인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당신의 공부가 예배의 일부분이 되도록 해 보십시오. 당신의 공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이성교제는 나쁜가요?

질문:

> 목사님 이성교제가 그렇게 안 좋은건가요?

> 주안에서 교제도 나쁜 건가요?

> 목사님 이성교제가 그렇게 안 좋은건가요?

> 주님 안에서 교제도 나쁜 건가요?

답변:

학창시절에 이성문제로 고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교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이성교제가 나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놓칠까 염려가 됩니다. 이성교제와 주님과의 교제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성교제에 집중하면서 주님과의 교제를 즐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제는 두 인격간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교제에 열을 올리는 동안 주님과는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탄탄히 한 다음 건강한 이성교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교제에는 원칙과 순서가 있지요. 성경은 건강한 교제를 가르칩니다. 잠언과 전도서와 아가서를 보면 이성교제에 대한 훌륭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건강한 이성교제의 원칙은 무엇일까요?

첫째 단계는 신앙적 교류이며, 둘째는 우정의 교류이며, 셋째는 감정의 교류입니다. 대게는 첫째 둘째 단계를 뛰어넘어 곧바로 셋째 단계로 직행하려고 하는 성급함을 보이지요. 그런 경우 많은 이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혹은 상처를 받는답니다.

교회 안에서의 이성교제는 특히 주의를 해야 하는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에서의 이성교제는 우선적으로 형제자매로서의 교제에 국한되는 것이 좋습니다. 가정에서 남매간에는 아무런 감정이 개입되지 않듯이, 교회 안에서도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는 사단에게 시험을 받게 되지요.

음...이성교제든, 주님 안에서의 교제든,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고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성교제는 나쁘고 주님 안에서의 교제는 좋고...하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옳고 그름의 기준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만약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에 방해된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나쁘다'고 단언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 안에서의 교제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흔히들, 이성교제를 할 때 서로를 바라보느라 시간과 감정을 소진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복음 안에서의 교제라는 명목으로, 혹은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의 교제라는 명목으로 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잘못된 교제가 '주의 이름으로'라는 명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진정한 교제는 우리 영혼에 영적 유익과 축복을 가져두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교제는 감정과 시간을 낭비하고 남는 것이라곤 상처와 허무함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교제, 서로의 영혼에 축복이 되는 교제를 해야 하며 그것을 배워야 하며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교제입니까? 참된 교제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참된 교제는 함께 나아가야 하고 협력해야 할 비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참된 교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동역(co-work)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제는 복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제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제하면서 내 시간과 감정이 소진되고 탈진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성교제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주님 안에서의 교제라는 이름으로 하는 모든 교제가 다 좋다고 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성교제이든, 아니면 주님 안에서의 교제라는 이름으로 하는 교제이든, 복 있는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무나 교제하지 마십시오. 왜냐면 당신의 영혼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이고, 또 상처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교제' '복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을 권면드립니다. 그래서 저는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을 훈련받기까지 '이성교제'를 절제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일까요? 시편 1편을 꼭 읽어보세요.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복이 있는 사람은 감정이 기복이 없는 사람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올바른 길을 선택할 줄 아는 의지가 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경청할 줄 아는 지혜가 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입니다. 만약 사귀려는 사람이 이런 복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함께 하도록 하십시오. 왜냐면 그 함께 하는 것이 당신의 영혼에 매우 유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와 함께 하는 일에 시간과 감정을 투자하지 마십시오. 왜냐면 그 함께 하는 것이 결국 당신의 영혼에 곤고함만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누구와 함께 하는가를 먼저 따져보아야 합니다. 왜냐면 어떤 사람의 됨됨이는 그가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보고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위대한 사람과 함께 한다면 당신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만약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당신도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입니다. 교제할 것인가 말 것인가? 를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시편 1편을 꼭 묵상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부디 당신의 영혼을 위하여,,, 교만한 자, 거만한 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멸시하는 자, 감정의 기복이 심한 자,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기는 커녕 멸시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아까워하십시오. 단,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는 목적이라면 예외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하는 의도에서라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상 서로를 바라보는 식의 교제는 서로에게 상처와 탈진을 안겨다주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신 복이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사람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이것보다 더 큰 인생의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10만권의 책을 주시기보다 10명의 진실한 동역자(co-worker)를 주십시오." 하나님은 신실하게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동역자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밤새도록 공부하고 밤새도록 얘기하고 했던 시절들이 저에겐 너무나도 아름답고 축복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제의 기억이 때론 힘들 때 저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왕 축복된 교제를 하고 싶다면 하나님께 기도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저에게 신실한 동역자를 주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복된 사람'과 교제하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동역자'와 교제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축복이 됩니다. 그 사람이 사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친구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사람과 만나 교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친구, 좋은 선배, 좋은 스승, 좋은 동역자를 달라고 말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서 인도해주시는 '복된 사람' '신실한 동역자'와 사귀십시오. 좋은 친구를 만나 좋은 교제를 하고 싶다면(그것이 이성교제든, 아니면 주님 안에서의 교제든 간에) 먼저 기도하고 인도하심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동역자와 교제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삶을 계획하십시오. 이것은 정말 굉장한 기쁨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방법 좀...

질문: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듣기 싫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 하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어떻게 하면 되나요?

답변:

네, 학생에게는 공부도 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공부하던 때가 제일 행복한 때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몇 가지 원칙을 세워놓고 공부하면 좋겠네요.

첫째, 좋은 성적을 내는 학생이 반드시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것을 즐기는 학생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좋은 성적과 학과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후회하거나 공허한 날이 찾아옵니다. 좋은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하려면 진학과 취직보다 더 나은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좋은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전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며 행복하게 해주는 가치 있는 무엇인가여야 합니다. 어떤 학생이 좋은 성적과 대학진학을 위해 공부하다가 그만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렸는데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에 몇 주간 전도여행을 부모와 같이 갔다 온 뒤로 공부에 취미를 붙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가난한 나라들에 가보니까 자신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 아이는 의과대학에 진학해서 의료선교사가 되는 꿈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치 있는 비전이 있을 때 공부는 더 잘 할 수 있고,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성적을 위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어로 복음을 전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면서 영어를 공부하니까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넷째, 좋은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는 이유는 습관이 무너져있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습관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규칙적인 생활, 규칙적인 복습과 예습이 필요하고, 자기 스스로 학습계획을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섯째, 좋은 글쓰기가 필요합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점점 글쓰기의 중요성이 강조될 것입니다. 미국만 보더라도 글쓰기 강좌는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과 계통으로 가려고 해도 글쓰기는 꼭 해야 합니다. 좋은 책과 글과 논문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자꾸 써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자기 논리를 가지고 논증하고 자기주장을 분명하게 글로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섯째, 좋은 친구와 스승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은 학교보다 좋은 스승이 더 중요합니다.

일곱째, 좋은 몸과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밝고 긍정적인 태도는 학습에 큰 영향을 줍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중요합니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뒤집힙니다. 정기적으로 운동을 한다든지 해서 체력을 비축해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중요합니다.

여덟째,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다니엘서 1장을 묵상해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모든 책과 지식을 통달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아홉째, 성경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는 것 역시 지혜와 명철을 얻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견문을 넓히는데 시간과 돈을 투자하십시오. 꾸준히 신문과 잡지를 읽거나, 정기적으로 여행하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어려운 친구관계는 어떻게?

질문:

목사님 친구관계에 관해서입니다. 한 친구가 이젠 부담으로 느껴집니다. 이젠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제겐 너무 편합니다. 무조건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가까워지고 싶진 않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잘난 것 하나도 없는 제가 제 기준에 맞추어 친구들을 판단했다는 것을 그리고 다신 다른 모든 친구들을 섬기며 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 친구를 멀리 하였고 그 친구를 책임질 자신감도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그 아이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멀리서만 바라보고 기도해주고 싶습니다.

답변: 하나님은 친구관계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연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시146:3-5절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서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친구관계 속에 많은 갈등을 느낍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그 친구를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저울질 하시고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친구를 당신에게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속에 있는 연약함과 허물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회개하고 새 힘을 얻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 있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사랑하는 것과 의지하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합니다. 그 예로, 친구가 배신하면 분노하게 되고 친구가 떠나게 되면 불안하고 허전해하는 것이 그 증거죠. 친구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의지하지 마십시오.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배신할 지라도 동일한 태도, 변함없는 태도로 대하겠다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친구를 하나님처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사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친구여, 그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대의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 바란다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그 친구를 변함없이 대해주기 바라네. 그 친구를 위해 긍휼로 중보기도해주기 바라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믿었던 사람을 통해서 부담감과 낙심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변함없는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변함없이 사람들을 대하십시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처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보다는 거리를 적당히 두십시오. 진정한 사랑은 몰입이 아니니까요.

공부와 비전에 대해서?

답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하는 형제.. wrote:

> 저는 지금 어찌해야 할지...

> 저는 지금 한가 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 컴퓨터 공부인데여

> 제적성에도 맞고 아주 재미있어 합니다

> 그런데 제가 조금씩 드는 생각에 ..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해야 되지 않을 까라는 생각입니다(선교 쪽으로 ....)

> 그런데 하나님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생각을 주시는 것 같은데여

> 확실하게 부르시는지 어떠한지 잘 몰라서...

> 그러니까 확신이 없어서 그런데여...

> 어떻게 해야 하나여??지금 공부도 손을 놓고 있고 참 방황 중이랍니다..

답변:

Very Good!!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시고 계시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공부하는 것과 '선교'의 관계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군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싶군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1)내가 좋아하는 공부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은 전혀 상충되지 않습니다.

(2)내가 좋아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 것인지 내가 찾아야 합니다.

(3)만약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제지하거나 지시하지 않는다면 지금 좋아하는 공부나 하기에 편한 적성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낼 달란트가 될 것입니다.

(4)선교의 영역이 아주 넓어요. 앞으로는 컴퓨터 분야에서 개척해야 할 선교의 영역이 참으로 많지요. 컴퓨터는 21세기에서 중요한 선교의 한 영역임에 틀림없습니다.

(5)선교를 하기 위해 공부를 포기할 필요는 전혀 없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선교를 위해 컴퓨터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6)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내가 좋아하는 이 공부/지식/재능을 통해 어떻게 선교에 이바지할 수 있을까?"

(7)불신자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족속들에게 컴퓨터는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그 매개체를 잘 이용하는 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8)공부는 게으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공부하면서 이것을 어떻게 이 선교의 목적을 이루는데 쓸 것인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연구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영어를 좋아했는데 영어로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겠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공부가 잘 되고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9)그러므로 공부와 하나님의 일은 서로 별개의 영역이 아닙니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연구해나가야 합니다.

(10)앞으로 선교지에 가면 컴퓨터지식이나 학교에서 배운 공부내용이 상당히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1)선교는 이방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인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경만 가르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들에게 일반 공부도 가르치고, 그들의 병도 고치고, 그들에게 때로는 컴퓨터도 가르치는 것도 포함되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많은 재능과 지식을 다방면에 두루 갖추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지금 공부를 놓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공부하는 것을 활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내어야만 해요. 제가 다시 공부하는 학창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저는 영어뿐만 아니라 다른 2외국어나 다른 몇몇 과목을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싶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생각이 오면 그것을 마음속에서 삭제하지 말고 계속 점점하고 확인하고 강화시켜 나가야만 합니다. 계속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세요. 그리고 창조적으로 생각하세요. 그 부르심을 위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그리고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그 부르심을 실천해니가세요. 어쩌면 지금 공부를 다시 열심히 하는 것이 그 중요한 실천의 일부분이 될지 모릅니다. 그냥 무작정 공부하지 말고, 왜, 무엇을 위해, 공부하며 이 공부한 내용을 가지고 부르심을 위해 어떻게 도구로 바쳐드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말이에요...건투를 빕니다.

알면서 짓는 죄는 용서받지 못할까요?

답변: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알고도 짓는 죄가 사실은 더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어디서부터 옵니까? 근본적으로 사랑에서부터 옵니다. 다시 말해서 알고도 죄를 범하는 근본 이유는 바로 사랑의 결핍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죄를 범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죄용서함을 받도록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물론 용서해주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주님께 돌아와서 '용서와 자비'를 구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넓으신 사랑으로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기도와 조치가 필요합니다. 내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결핍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첫째, 깊은 회개를 통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깊어집니다. 피상적인 회개는 또 반복적인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깊은 뉘우침이 동반하는 회개를 할 때 우리는 한번 죄를 범한 것을 다시 범하지 않을 능력을 얻게 됩니다.

둘째,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말씀을 사랑하고 늘 묵상하는 경건한 습관을 들일 때 알고도 범하는 죄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능력을 얻게 됩니다.

넷째,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상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섯째, 죄의 결과는 항상 파괴적이고 강한 전염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알고도 죄를 범하는 경우가 사실 많습니다. 그 이유는 대개 그것이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그것이 가져다주는 파괴적인 결과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고도 범한 죄라 할지라도 사랑의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해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까?

질문:

> 하루라도 기도를 하지 않으면 죄의식을 느낍니다.

> 기도를 빼먹는 것도 죄가 되나요 ?

> 그리고 매일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 어떻게 해야 하죠 ?

>

답변: 예, 기도를 빼먹는 것도 죄가 됩니다. 사무엘상 12장 23절에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절)고 명령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에 호흡을 멈추면 곧 죽는 것과 같이 기도를 쉬면 곧 우리 영혼이 메말라가기 때문에 기도하라는 명령은 우리 영혼의 생명력 있는 삶을 위해 주어진 명령입니다.

매일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마음 아파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호흡을 할 때도 반복하구요, 밥을 먹어도 반복적이고 습관적입니다. 습관적인 기도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나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력 있는 기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화'입니다. 기도가 재미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이유는 쌍방통행의 '대화'가 아니라 일방통행은 '설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 설교하는 설교처럼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친구랑 교제할 때도 일방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상대방이 얼마나 지루해할까요? 우리가 전화통화를 할 때도 내가 일방적으로 한시간을 얘기하고 끊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요? 기도의 본질은 '대화'입니다. 우리가 친구와 대화할 때는 몇 시간이고 지루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도는 왜 그렇게 지루할까요? 주님과 대화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죠. 주님께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거나 설득하려들거나 혹은 연설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생동감 있고 재미있는 기도를 하기 원한다면 대화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대화합니까? 친구와 어떻게 대화해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보면 압니다.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살펴보지요? 그런 다음에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에 경청해줍니다. 그런 다음에 상대방에게 나의 의도를 얘기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교제하고 싶은 친구랑 좋은 교제를 오랫동안 하고 싶을 때 하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입장에서 서 보는 것이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의 원리를 적용해보십시오. 주기도는 암송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 기도에 적용하라고 주신 겁니다. 주기도의 원리에 따라 기도해보도록 해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할 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연습을 해보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의 재미는 은밀한 장소에서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속삭이듯이 기도할 때 회복된다는 겁니다. 통성기도나 기도회에서의 기도는 그 재미가 오래가지 않습니다. 기도의 즐거움은 은밀한 기도생활에서 찾아오는 축복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는 절대로 그냥 부르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부르시는 자에게 '비젼'과 '은사'와 '확신'을 주십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확인할 수 없고 오직 자신만이 확인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지요.

첫째, 비전이란 나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을 말합니다. 부름받은 사람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뜻을 이루실지 알고 있습니다.

둘째, 은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준비시켜주시는 섬김의 능력입니다. 부름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로 부름받은 사람은 가르치는 은사와 다스리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런 은사의 유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사와 함께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 하나님이 부르심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확신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이 대문 밖에서 자기를 부를 때 그것이 부모의 음성인지 이웃집 아저씨의 음성인지는 오직 자식만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부르신 자는 그것이 하나님이 부르신 것임을 너무나도 확실히 압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에서 생기는 신비입니다.

넷째, 하나님이 부르신 자는 자기 생활 속에서 그 부르신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는 목회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신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교사는 선교하는 현장 속에서 그 소명을 확인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증거를 우리가 순종하는 현장 속에서 비로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소명감'이라고 부릅니다. 이 소명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성질입니다. 분명한 소명감은 우리를 방황하지 않게 붙잡아주지요.

죄에 대한 징계가 없으면?

질문:

> 죄에 대한 징계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아닌가요 ?

>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

>

답변: 예, 맞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반드시 징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징계를 받지 않는 사람은 사생자요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을 꼭 읽어보세요!!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입니다!

그러나 징계가 즉시로 오는 경우도 있고 한참 있다가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면, 벧엘로 올라가지 않았을 때 약 10여년이 흐른 뒤에 하나님의 징계가 뒤따랐습니다. 다윗의 경우는 밧세바의 일로 범죄한 이후 약 10개월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책망하시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죄를 범하고 즉시 징계를 하시는 경우보다는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기간을 주시고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죄에 대한 징계가 없는 사람은 분명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에 대한 징계가 속히 임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렇게 느껴질 때,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할 수 있는 깨달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징계가 속히 임하지 않는다고 자신은 하나님께 사랑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라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실 때, 우리는 즉시 겸비해져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깊이 낮추는 것만이 우리 영혼이 소생케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현대에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 이유?

질문: 구약 시대와 달리 현대에는 왜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답변: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현대사회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은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지요. 자,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요? 성경을 통해 알았을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에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성경을 통해서 알려고 하기보다는 우리 경험을 통해서 알려고 할 겁니다. 신약성경을 보세요. 구약에 나타난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현대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권능은 변함없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현장 속에 우리가 가보지 않고 있을 뿐이지요.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선교사님들의 보고를 들어보면 간접적이나마 그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중국에서 사도행전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구요, 남미에서도 하루에 5,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의 역사는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현장에 있지 않다고 해서 현대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능력도 과거나 오늘이나 변함없습니다. 오직 믿는 자들 가운데서 그 능력은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능력은 감추어 있지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은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지금도 믿는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권능은 과거보다 더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 원한다면 그 현장으로 가보십시오. 가서 보고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자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병원이 많은 도시보다는 병원이 없는 시골에서 더 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려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곳에 가면 됩니다. 단지 우리가 있는 곳을 절대화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우물 안 시각입니다. 내게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말하는 것도 시각장애인의 판단입니다.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변화가 진짜입니까?

질문: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

아니면, 한번에 180도로 변화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

답변: 어느 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점진적으로 변화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급진적으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변화를 얘기할 때 주로 '구원'과 '성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내 안에서는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왜냐면 이전에는 내가 삶의 주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이전에 내가 추구해왔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포기하고 내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의 삶은 매우 점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말씀을 하셨으며, 나를 향해 어떤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시는 지를 점차적으로 배워나가는 정도만큼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는 정도만큼 나는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같이 볼 때 우리가 급진적으로 변화되는 것과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함께 경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주인으로 영접하신다면 당신은 아마도 180도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신앙생활하고 계신다면 당신이 그분께 당신의 삶을 내어맡기는 정도만큼, 다시 말해서 그분의 성령이 당신의 삶과 마음을 통치하시는 정도만큼 점차적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변화되기 원한다면, 변화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내 영혼의 참된 변화를 가져다주는 주인공이십니다. 그분을 알고 경험하는 것만큼 나는 그분을 닮아가는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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