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집은 엄격한 유교집안인데 제사 드려도 되나요?
답변: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제사는 귀신들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한다는 십계명의 제 1, 2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결코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여호와이심을 진정 안다면 제사지내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가족의 질시가 두렵습니까? 아니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더 두렵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성질입니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느냐? 아니면 조상귀신이나 안 믿는 친척들의 눈초리를 더 무서워하느냐? 이것은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우리는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지옥에는 던져 넣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능히 지옥에 던져 멸하시는 그런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타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런 곳에 적용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온 목적이 화평케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시고 하나님만이 우리가 섬길 유일한 여호와이심을 믿는다면 최후의 마지노선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저는 종종, 가족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사에 참여했다가 믿음이 영영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영영히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진정 가족들과 친지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싶다면 내가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떳떳하게 알리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면 그날에 예수님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하면 그날에 예수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비바람에 못 이겨 비스듬히 눕고 마는 갈대가 되지 말고 차라리 부러지고 마는 참나무가 되십시오.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절개를 지켰던 다니엘과 그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생각하십시오. 다니엘서를 묵상해보세요. 에스더를 읽어보세요.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부끄러워하거나 처음부터 타협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전부'를 다 내어주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동지방에 어느 여행자가 텐트를 치고 자려고 하는데 짐을 싣던 낙타가 춥다고 말하면서 자기 발만 텐트 안에 들어놓겠다고 말했더랍니다. 그래서 주인이 좋다고 했는데 조금 있더니 두 발만 들어놓겠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좋다고 했더니 나중에는 얼굴만 들어놓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좋다고 주인이 말했는데 결국에는 텐트 안에 전부다 들어와서 차지하더니 주인을 텐트 밖으로 쫓아내더라는 우스운 얘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회생활하면서 지켜야 할 신앙의 마지노선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얘깁니다. 절대 물러서지 않는 선을 긋고 끝까지 지켜나가십시오. 그것이 진정 내가 사는 길이요, 남도 살리는 길입니다. 두려워서 조금씩 양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모든 것을 다 양보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엄격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보다 더 엄하고 무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지옥에 던져 멸하실 수 있는 권능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기십시오. 아무리 좋은 말로 설득하더라도 예수님이 사단에게 하신 말씀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였다고 외치면서 절대로 절하지 마십시오. 이 시험을 잘 감당하면 큰 축복과 상급이 뒤따를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넘어지면 나중에는 더 일어서지 못할지 모릅니다.
저의 집도 엄격한 유교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질시와 미움 속에서도 꿋꿋이 마지노선을 지켜나갔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입니다. 20여년이 지난 요즘은 친척들이 모이면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어릴 때 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친지들 앞에서 제가 예배를 인도합니다. 지금은 아무도 저보고 절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끝까지 선을 지켜나가십시오. 하나님이 승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사명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질문:
>기도를 하거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데, 이게 내 사명인가..하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 하지만 확신이 없이 계속 헷갈리는데.. 이건 왜 일가요? 앞에서 사명은 분명한 확신이 있다고 하셨는데. 자꾸 이런 생각이 나는 이유는 왜 일까요?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구약 사사기를 보면 기드온이란 인물을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때 기드온은 확신이 생기지 않아서 하나님께 두 차례에 걸쳐 증거를 간구합니다. 부름받은 자가 간구할 때 하나님은 신실하게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이런 혼돈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소명을 주시는 것 같은데 확신은 들지 않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고민하지 말고 다시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 그 소명의 증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질서와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부름 받은 우리가 확신 없이 행동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확신이 없는 자를 부르실 때는 확신을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빌2: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신 자가 부르심을 수행할 수 있는 것들을 예비하신 후에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부름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확신, 은사, 능력, 재정, 필요한 동역자 등을 준비해놓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부르심을 주시는 것처럼 여겨질 때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그런 것을 구하십시오. 만약 그것을 주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고 단정해버리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 욕심이나 편견과 같은 잘못된 감정이 만들어낸 허상이거나 아니면 마귀가 내 마음에 집어 넣어준 것일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만약, 제가 목회자로 부름 받았다고 느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목회에 필요한 능력과 은사를 공급해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이 길을 그만 둘 것입니다. 혹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약속하셨는데 만약 부르신 대로 주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재정이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이 길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이 신실하게 필요한 것을 구할 때 넉넉하게 공급해주신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결코 '헷갈리는 방식'이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분명합니다. 명확하지요. 그러므로 그것을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기다려보십시오. 그런 다음에도 그것이 없다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것을 잊어버리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질문: 인간의 관점이랑 하나님의 관점을 구별하는 법이 헷갈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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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을 구별하는 법은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과 연단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을 묵상할 때 그 둘을 구별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들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믿음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관점이란 하나님이 없다, 함께 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상황을 보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관점이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전제에서 모든 상황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시각을 배제한 것이며, 하나님의 관점은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죄인'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의인'일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힘든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비극'이라고 보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보는 것--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진정으로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배우기 원한다면 우선 성경을 보십시오. 적어도 일 년에 1-2독을 정독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생활하면서, 스스로 이렇게 질문해보십시오.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경우)를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그러면 우리는 저어도 거듭난 인생이라면 사람의 관점을 극복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몸에 배이도록 자신을 훈련하는 것도 좋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잘 생각나지 않는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이 경우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가르쳐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보는 것은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 훈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축복입니다.
의심과 낙심이 생기는 이유?
질문: 정말로 하나님을 잘 믿고 열심히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하는 회의와 낙심이 왜 오는 것입니까 ?
답변: 하나님의 사람 다윗에게도 '낙담'이 찾아왔지요.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을 위해 일했던 선지자 엘리야에게도 그런 감정이 찾아왔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회의와 낙심이 찾아왔구요. 하박국 선지자나 요나 선지자와 같은 많은 선지자들이 회의와 낙심에 빠져 한동안 힘들어했던 적이 있었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비전과 열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회의와 낙심이 찾아올 이유가 없지요. 불신자들은 회의와 낙심에 빠질 이유가 전혀 없지요. 오히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회의와 낙심이 생길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이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회의와 낙심으로 연결될 때가 간혹 있지요. 그것은 대부분 하나님을 향한 지나친 열심과 열정이 낳은 감정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이랍니다. 사람의 기대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버리면 그런 감정의 결과가 생기지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전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대하세요. 하나님을 기대하되 내 기대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내 기대에 부응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하되 하나님의 약속하신 범위 안에서 기대하는 법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선교사님은 해외에서 충성스럽게 사역하시는 중 그 자녀가 탈선하는 것을 보고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라고 깊은 회의와 낙심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선교사님들 가정에 종종 있는 얘깁니다. 왜 회의와 낙심이 들까요? 내가 충성하면 적어도 자녀들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버리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감정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어떤 상황이든지 항상 선한 결과를 만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름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장) 하나님은 항상 최선을 주시는 분이심을 잊지 마세요. 그것이 회의와 낙심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내 기대에 가두어버리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지만 내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부응하시는 그런 선하신 분이십니다. 내 기대에 못 미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는 내가 기대하지 못한 더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시는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멀리 내다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바로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종종 회의와 낙심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멀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of God)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충성하는 종들을 위해 언제나 최선으로 좋은 것을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놀라운 상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공기가 눈에 안 보인다고 없다고 말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선하심도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선하시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감각에만 의존하여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언제나 자주 이런 회의와 낙심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감각에 의존하지 말고 약속의 말씀에 의존한다면 절망적인 상황, 불평해야 마땅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실패할 때 하나님을 기뻐하며 성공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회의와 낙심이 들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그런 때에도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이것이 회의와 낙심이 들 때 승리하는 성도의 힘입니다.
방언이 올바르고 꼭 필요한 것입니까 ?
답변: 방언이 올바른가에 대해서는 성경이 분명하게 대답해주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방언이 성령이 나눠주시는 신령한 은사 중에 하나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올바르지 못한 방언'에 대한 두려움인데,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잘못된 방언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은 '잘못된 방언이 있으니 그것은 조심해라'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답니다. '잘못된 방언'에 대한 강조는 성경이 주는 교훈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령한 은사'에 대해서 사모하지 못하게 만들게 하려는 마귀의 계략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은사들을 하나님께 구할 때 우리가 잘못되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사실은 마귀가 주는 것이지요. 잘못된 은사에 대해 강조하는 가르침은 마귀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대신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하고 있지요. 우리가 뱀을 구해도 하나님은 알아서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을 말하고 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잘못된 방언을 받게 되리라고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신령한 은사를 구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귀의 가르침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그 간구하는 자녀들에게 결코 잘못된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잘못된 방언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 좋은 것을 구하지 않는 태도가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하는 식이라고 할까요. 잠언서에 보면 “우리에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으로 주시는 좋은 분이십니다. 두려움을 강조하는 가르침을 거절하십시오.
방언의 은사가 필요한가요? 예, 필요합니다. 특히 하나님과 깊은 기도의 관계를 맺기 원하거나 중보의 사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볼 수 있지요. 사도 바울도 자신이 방언을 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답니다. 성령의 은사는 섬기라고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방언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이유는 섬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더욱 깊이 주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그리고 더욱 깊이 중보기도로 공동체와 다른 지체들을 섬기려고 한다면, 이 방언의 은사야 말로 정말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방언을 잘 못하지만 그러나 늘 열려 있습니다. 사모합니다. 천국의 언어로, 주님을 섬기고, 공동체를 위해 깊이 중보하는 자로 섬기고 싶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모든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으신 천부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잘못된 것'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두려움은 절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바입니다.(고전14:1절) 물론 은사 없이 모범적인 신자의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삶을 청산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그리고 능력 있게 섬기기 원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은사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그것을 환영하며 사모하며 구해야 합니다.
능력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은사들을 담대히 구하십시오. 교회는 능력 있는 섬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으며, 주님은 그 능력을 얼마든지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이성교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지난번 이성교제에 대한 저의 생각을 올렸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할 필요를 느껴서 이렇게 다시 글을 올립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끌리는 것은 자석의 S와 N이 서로 끌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이치이지만 몇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중요한 함정이 있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수많은 실패를 통해 배운 것들입니다.
(1)서로에게 지나치게 잘 대해주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저는 처음부터 너무 너무 친절하게 잘 대해주는 사람 치고 결혼해서도 끝까지 잘 대해주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매에게 지나치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 형제는 결혼해서 구타하는 남편이 되기 쉽고요, 형제에게 지나치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 자매는 결혼 후에 바가지 긁거나 바람나기 쉽답니다. 그 이유인즉슨 이성간의 사랑은 강한 소유욕구에서 시작하기 때문인데 일단 상대방을 내 것으로 삼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야수와 같은 자기 본성이 드러나기 마련이거든요. 구약에 압논이 다말을 연애하다가 자기 욕망을 채운 다음에는 다말을 가차없이 내쫓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래서 사람은 자기 마음을 잘 모른답니다. 자기는 정말 그(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는데 일단 얻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자기 마음이 확 바뀌어 버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커플이 상처받는지 모릅니다. 이것 때문에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고요.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내 것으로 삼고자 하는 욕망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범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섬기는 행위이지요. 상대방의 욕구를 채워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의지적으로 자립한 사람입니다. 홀로 서기한 사람만이 남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지요. 반대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은 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한답니다.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을 소중히 생각하지요. 자기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남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볼 때 대부분의 잘못된 이성교제는 자기 욕망,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시작하는 이른바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필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끝나버리지요. 저는 많은 이성교제가 진정한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욕망에 기초한 불장난이라고 정의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먼저 내가 홀로 서기한 다음에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럴 때만이 주기 위한 사랑이 가능합니다. 홀로 서기 하지 못하면 받기 위해 주는 사랑을 합니다. 그 결과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한 사랑을 주는 수동적 관계가 유지되지요. 그러면 상대방으로부터 받지 못하면 나는 배신감을 느끼고 '헐크'나 '하이드'로 변신하여 상대방을 공격하게 되지요. 이것이 이성 간의 비극입니다.
(2) 자기에게 좋은 배우자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욕망에 근거한 잘못된 기도입니다.
많은 지체들이 자기에게 좋은 배우자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저는 그것이 정욕적인 기도라고 단적으로 딱 잘라 말합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다고 잘라 말합니다. 왜요? 자기는 전혀 변하지 않기 때문이죠. 자기는 '좋은 배우자감'으로 변화하기를 거부하면서 좋은 배우자를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기 욕심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만약 그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신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고 재앙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자기는 초라한데 자기에게 너무 과분한 조건의 배우자와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 받을 것인지를...그러므로 행복한 결혼생활, 가정생활, 부부생활을 원한다면...진정...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적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공평하신 분이신지요.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에게 맞는 배우자를 예비해놓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돕는 배필'(suitable helper)라고 하지요. 이 말은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비전을 소유하고 있어야 비로소 '돕는 배필'을 맞이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무위도식하는 자에게는 '돕는 배필'이 필요 없지요. 그러므로 정말 나에게 필요한, 그리고 적당한 돕는 배필을 만나고 싶다면...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소유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보고 지향하고 전진해나가는 어떤 청사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지요. 비전 없이 교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함께 앞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 없다면 서로를 바라보다가 금방 지치게 되고 말지요. 결국 서로에게 요구만 하다가 나중에 파탄에 이르게 된답니다. 가정생활의 위기는 이것 때문에--비전의 상실-- 찾아옵니다. 그래서 먼저 결혼을 위해, 건강한 이성교제를 원한다면, 먼저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한 사람은 결코 남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지요. 자기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없지요. 저는 우리 세청일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영혼을 위해,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 더 깊이 기도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배우자를 선택할 때 중요한 기준은 '믿음' '신뢰'(credibility)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신앙을 가진 많은 청춘 남녀들이 믿음을 붙잡지 않고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하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신앙은 좋은데...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선입견이나 자기 주관이나 자기 편견을 강하게 고집하는 것을 봅니다. 저도 결혼하기 전에 이것 때문에 사실은 많이 힘들어했는데요. 결론은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믿음은 가는데 감정이 안 가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건 아니에요. 반대로 감정이 안 가는데 믿음은 가니까 응해야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감정에 따라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요! 이것은 경험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경험해보고 깨달으면 이미 때는 늦습니다. 자기감정을 믿으면 큰 일 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얼마나 신실한지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 지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얼마나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상대방의 믿음에 대해서, 상대방의 신실성에 대해서 믿음이 가지 못한다면 저는 "NO"라고 잘라 말해버립니다. '절대로 사귀지 말아라'고 말이죠. 아무리 호감이 가는 상대라 할지라도 약속을 어긴다든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다든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몸부림이 없다면 미안하지만 아니올시다. 감정에 의존하지 마십시오. 감각을 붙잡지 마십시오. 부디 믿음으로 행동하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원천입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감정은 믿음 다음에 뒤따라오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감정이 먼저이면 그 다음에 뒤따라오는 것은 서로 상처받는 것뿐이지요.
제가 사춘기시절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배운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먼저 변화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먼저 감정적으로 홀로 서기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먼저 기도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온전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진정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다른 한 사람을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책임질 정도로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부모를 떠나(자립)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로다! 주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홀로서기 하기를 바라십니다. 홀로 서기한 인생이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립니다.
답변: 좋습니다.
(1)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는 때론 하나님 음성을 듣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묵상한답니다. 성경을 함께 읽으면서 기도를 병행하도록 해 보세요.
(2)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하세요. 계속 찬양하면서 기다리세요.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시지는 않는답니다. 하나님은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많이 아뢰고 찬양 드려야 할 시간입니다.
(3)하나님의 음성이 세미하고 우리 마음은 때로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과 기타 욕심 때문에 우리는 잘 듣지 못합니다. 그럴 때는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욕망과 욕심에 대해서 자기를 부인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온전한 금식'을 하면서 한번 기도해보세요. 자기 자신의 모든 욕망을 거부하면서 하루 정도 시간을 정해서 작정하고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기도의 시간을 만들어보세요.
(4)하나님의 음성이 그래도 안 들린다면 우리는 스스로 지각을 사용하여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읽는 것과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5)새벽 미명에 주님이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기도하신 본을 따라보세요. 고요한 곳, 은밀한 곳, 한적한 곳에서 주님을 생각하며 기도해보세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질문
>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뜻하시는 것과 계획하신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내가 원하고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뜻하심 아래 어떻게 내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내게 어떠한 삶을 계획하셨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 어떠한 길을 예비하셨는지 내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기도로 준비되어 나갈 때 깨달음과 확신을 주신다는 것 입니까?
> 또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과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첫째, 기본적인 뜻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양심과 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있지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지극히 선하신 뜻이 있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갈 때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랍니다. 내가 어떤 법칙을 지킬 때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랍니다. 우리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첫째, 세상을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을 본받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지요. 둘째, 그런 다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자 하는 마음의 갈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갈망하고 경외하는 자가 되도록 하십시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십시오. 먼저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답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믿음으로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무엇보다 기뻐하시는 기도랍니다. (참고로 롬12:2을 묵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싶다고 했는데, 앞서서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소원을 일으켜주십니다. (빌2:13절을 묵상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그분의 계획을 집어넣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면 그 다음엔 그분의 계획과 나의 계획이 온전히 일치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분 안에 거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그분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피곤한 작업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하십시오. (요15:1-8절을 꼭 읽어보세요.)
기본적으로 내가 거듭날 때(주의 은혜로 마음이 새로워질 때), 주님은 내게 새로운 비전과 그 비전을 수행할 수 있는 달란트까지 한꺼번에 주신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기 전에 먼저 내가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으면 나를 향하신 주님의 온전하시고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저절로 밝혀지게 해주십니다. 그때 주님의 계획과 뜻은 내 계획과 뜻과 정확하게 일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내 소원과 별개로 강제적으로 당신의 소원을 주입하시지 않으십니다.
빌4:13절의 말씀은 이런 뜻이에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는 모든 상황을 만나도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모든 상황에 적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참 만족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겁니다.
금식의 의미?
답변: 좋은 질문이에요. 많은 지체들이 금식하면서 사실 금식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할 때가 많아요. 금식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하면 더욱 더 강력한 금식을 할 수 있을거에요.
금식은 믿음으로 기도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입니다. 금식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결코 아니랍니다. 그러면 금식이란 어떤 의미일가요? 금식(fast)의 의미는 한 마디로 "자기 부인"(self-denial) "자기 부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한 일환으로서 금식을 합니다.
식욕은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지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고 했지요. 그래서 식욕을 잠간 억제함으로써 죄를 다스리는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이지요. 또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금식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믿음으로 확증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금식의 목적은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그분을 갈망할 때만이 금식은 비로소 의미가 있지요. 그리고 금식은 힘들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너무 너무 사랑에 빠져 있다면 그는 분명히 식욕이 감퇴될 것이 분명합니다. 또는 너무 너무 슬픔에 빠져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금식은 쉬울 것입니다. 구약에서 금식은 슬픔의 표현이었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더 갈망하기 위해서였지요. 금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금식은 하나님을 더 갈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답니다.
중요한 것은,,,금식한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하면서 다른 부분에서 절제하지 못한다면 온전한 금식이 될 수 없지요. 예를 들어, 밥을 안 먹으면서 군것질을 한다든지, 오락을 한다든지, 말다툼이나 싸움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죠. 금식할 때는 온전히 자기의 모든 욕망을 부정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온전한 금식에 대해서 이사야 58장이 잘 가르쳐주고 있지요. 금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속박을 끊어버리는 중요한 무기랍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모든 욕망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갈망하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금식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이 금식의 의미와 방법에 대해서 이번 수련회 때 특강을 해보려고 생각중입니다. 저는 우리 세고 지체들이 금식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적용하기 시작한다면 삶과 사회가 놀랍도록 변화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이유?
답변: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을 창조하셨을까요?
그 대답은 창1:16,27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그 대답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을 당신과 닮은 존재로 만드셨을까요?
그것은 같이 교제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자, 우리가 학교에서 누구를 친구로 삼습니까?
나랑 비슷한 사람이죠? 왜요? 나랑 비슷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자, 어떤 사람이 자기 모습을 쏙 빼닮은 아들을 하나 낳으려고 노력한다고 칩시다.
왜 자기 모습을 닮은 자녀를 꼭 낳으려고 노력할까요? 그냥 살면 되지 않을까요?
자기 모습을 닮은 존재를 바라보면서 그저 기뻐하게 될 뿐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양대로 만드시고 바라보시면서 한없이 사랑하시는 기쁨을 그 피조물인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요?
자, 어느 과학자가 자기 모습을 꼭 빼닮은 인조인간을 하나 만들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며 수많은 거금을 투자하고 있다고 칩시다. 사람들이 왜 그 많은 돈을 가지고
그냥 혼자서 행복하게 살면 더 좋지 않겠느냐며 비웃을 때 사람들은 '사랑'을 얼마나
이해할까요?
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은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무한한 영광으로 함께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피조물인 인간들은 과연 얼마나
창조주의 마음을 헤아릴까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와 함께 사귀기 위하여, 우리를 바라보시고 기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그 놀라운 솜씨로 창조하신 사실을 얼마나 알까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두려울 때?
질문:
하나님께 나아가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너무 타락 하여서 제 죄에 눌려서
나아 갈수가 없습니다. 기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계속 이대로 살까봐 두렵습니다.ㅠ.ㅠ어떻하죠??
답변: 은혜를 사모해야 할 때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주셔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하나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내 힘만으로 노력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눈은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결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겸손히.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먼저 내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것이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십시오. 자신에 대해서 정직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나치게 변명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정직하지 못하다는 증거죠.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서 정직하도록 노력하십시오.
(2) 자신의 그러한 모습 때문에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께 나아갈 힘은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온유함이죠.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는 온갖 좋은 것을 얻는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주실 것을 갈망하세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세요.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주셔야 비로소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인도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까지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당신 자신의 하나님을 기다리세요"
"당신의 하나님으로 당신에게 찾아오실 때까지 기다리세요"
"결코 조급하지 마시고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끝까지 붙드세요"
하나님이 결코 멀리 계시지 않는 것 같군요. 제가 볼 때 질문하는 지체의 곁에 한걸음씩 다가오고 계시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그대를 먼저 방문해주시기 전까지는 나는 다만 그분을 믿음으로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결코 기대를 깨드리지 않으시는 은혜가 많으신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주일에는?
질문
> 성경에 보면 주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잖아요..
> 그러면 학생신분에서의 일이란 공부인데..
> 공부도 안 되나요?
> 웃기는 질문인 것 같지만...
> 저희 학원이 주일날 수업이 좀 많은 편이거든요..
> 주일에 열심히 예배드리고 바로 학원가서
> 몇 시간만 하고나면
> 오늘이 주일이었나??
> 할 때가 많아서요...
>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 구절이 자꾸 떠올라서
> 물론 공부를 아주 안하라는 건 아니겠죠??
> 그래도 확실한 답변 부탁합니다...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최초의 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건데요,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사역을 하시고 마지막 하루를 안식하셨습니다.(창1장) 여기서 안식하셨다는 것은 그냥 쉬셨다는 것보다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바라보시면서 온전히 즐거워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사람은 그 안식에서 제외되고 말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안식을 다시 주시기 위해 당신의 안식을 포기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역사라고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 약속에 따라 애굽에서부터 구원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안식일을 제정해주셨지요. 안식일을 주신 의도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로운 민족으로 창조하신 사역을 온전히 즐거워하라고 주신 것이랍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냥 쉬라는 것이 아니라 쉬면서 참된 일의 의미를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즉, 애굽에서 7일 동안이나 일에 노예가 되버린 그들에게 일의 참된 의미를 되찾아주시고자 하신 것이지요. 일의 노예됨에서부터 자기들을 구원하시고 새로운 일의 의미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하루죠. 그래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선물이랍니다.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은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을 말하지요. 신약에 와서는 이 안식일 개념이 새롭게 바뀌게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이 "내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지요. 이 말씀은 다름 아니라 바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면서 하신 말씀이랍니다. 즉,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하심으로써 참 안식의 개념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시는 것입니다. 참 안식이란 하나님이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의도를 알고 순종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의도를 알지 못한다면 분명 일의 노예가 될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를 안다면 우리는 일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창조적으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자...그러면 이제 학생의 신분으로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좋을까요?
(1)주일은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하는 축복된 날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2)평소에는 열심히 공부하지만 적어도 주일에는 내가 왜 공부하는지,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기 위해 공부를 잠간 쉬어주어야 합니다.
(3)공부의 목적과 이유를 분명히 하는 날로서 주일을 주님 앞에서 온전히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더욱 창조적으로 공부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4)만약 공부의 이유와 목적을 안다면 주일에도 공부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공부하는 것 자체가 곧 예배가 될테니까요.
(5)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이 공부의 노예가 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오히려 공부의 영역에 있어서 노예가 아니라 청지기이자 창조적인 주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6)그래서 주일에는 공부를 절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공부할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서 왜 내게 공부하라고 하시는 지 소명감이 분명하지 않은 채로 공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공부의 노예가 돼버렸다는 증거입니다.
(7)하나님을 사랑하는 학생이라면 공부를 쉬면서 공부할 이유와 목적을 점검하는 날로 주일을 삼는 것이 당연한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챙겨 먹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8)안식일은 그 자체를 위해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9)제가 볼 때 안식일에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성적이 항상 올라가고 주일에 공부를 안한다고 성적이 내려간다든지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일에 공부한다고 그 인생이 꼴찌인생이 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위해 공부하는 일을 잠간 절제하는 법을 배운 인생이 나중에 더 잘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10)공부는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주일은 공부를 잠간 쉬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날로 온전히 보내는 것이 더 전략적이라고 봅니다.
참된 안식이 공부하는 영역에서도 경험되어야 합니다.
공부의 노예가 되지 마세요.
공부의 안식을 배우기 바랍니다.
공부의 이유와 목적을 주님으로부터 배우기 바랍니다.
그런 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주일날 공부한다고 인생에서도 반드시 성공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이 성공합니다.
공부하는 영역에서도 안식은 지켜져야 합니다.
공부를 잠간 쉬면서 공부의 이유와 목적을 재발견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승리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가 안 되고 답답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변:
좋습니다.
기도가 안 될 때가 있죠. 저도 기도가 될 때보다 안 될 때가 사실 더 많아요.
기도가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니까요.
기도가 잘 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겁니다.
그러나 사실 기도가 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지요.
기도가 잘 안될 때 우리는 먼저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시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힘으로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정직해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 기도하려고 하면서 사실 자기가 기도를 잘 한다고 착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올바른 기도를 드리기 위한
첫 단추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 힘과 의지만으로 기도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중지하세요.
그런 다음에 우리는 기도를 위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해보세요.
"하나님, 저는 힘이 없습니다. 기도할 힘이 전혀 없어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기도할 대 그저 답답하기만 합니다. 제 상태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제가 내 힘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 기쁘게 기도하기 원합니다.
그러니 주님, 저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세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기도하는 기쁨을 회복시켜 주세요. 기도하는 힘을 주세요."
우리가 기도할 때 힘든 이유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만
기도하려고 덤비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기도하기 힘들어지면 곧바로 우리는
먼저 기도할 힘을 주시도록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힘을 위에서 부어주실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결코 내 힘으로 기도하려고 덤비지 마세요.
기도는 성령의 힘으로 해야만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렇게 두 종료의 차원이 있답니다.
첫째는 내 힘으로, 의지력만으로 기도하려는 사람
둘째는 하나님의 힘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기도하는 사람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자, 답답할 때, 잡생각이 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할 힘을 부어주실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며 기도의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위해 먼저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영을 부어주시도록 먼저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힘을 주실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저는 기도하기 전에 3곡 정도의 찬송을 부릅니다.
기도가 안 되면 찬송하십시오.
그래도 안 되면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할 때 성경을 같이 읽어가는 것은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때로는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알지 못할 때 저는 성경을 읽고서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기도할 때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우리에게 열어주셔야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있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기도의 힘을 부어주셔야 우리는 기도의 맛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기도할 힘을 전혀 주시지 않더라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힘을 안 주셨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교묘한 핑계일 수 있지요.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서는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도가
힘든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서는 너무 사소한 작은 것들, 작은 욕심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중요한 것을 가지고 기도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깊이 회개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해보세요.
기도를 하기 전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기도가 되도록 먼저 기도를 위한 기도를 드릴 것
그 다음 마음을 여는 찬송을 3곡정도 진심으로 부르세요.
그 다음 기도를 돕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잠간 묵상해보세요.
기도하는 데는 시편이나 신약의 서신서가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기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게 되어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투쟁이요 씨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고난이 이해가 안 됩니다.
질문:
경건 서적중 하나를 읽고 있어요..
제목은 자아발견과 영적 성숙이라는 책이에요.
이 책에서 .. 하나님의 사람은 광야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모세, 여호수아. 요셉. 다윗. 예수님을 예로 하고 있어요.. 글 중에..
"이 땅에 죄 없는 사람은 한 분 있었다. 그러나 고난의 광야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하셨다.
하나님자신도 고난을 받으셨다...."라고 되어있 어요,,
여기서 하나님 자신도 고난을 받으셨다는 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그것도.. 예수님과의 삼위일체로 인한 것인가요? 고난받으신 것은 예수님인데..
아니면.. 아들의 고난이 곧 하나님의 고난이 되신건가요?
그러면.. 우리의 고난도 하나님의 고난이 되는 건가요?
알고 싶습니다..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하나님도 고난당하시는가? 예수님이 당한 고난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음...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하나님의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3위로 계시는
분 중에서 제 2위 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과 안식을 잠시 내려놓으시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 고난 많은 세상에 내려오신 것 자체가 고난이죠.
그러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하나님의 고난이 되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질적으로 다른 얘깁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인 반면에 우리의 고난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죠.
따라서 그분의 고난을 우리의 고난과 동일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당하신 고난은 온전히 우리를 위한 중보적 대속적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고난은 죄악 세상 속에서 살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지
누구의 구원을 위해서 대신해서 값을 치르는 대속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자,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참조했으면 좋겠네요.
욥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나요? 아니죠.
그의 고난은 누구의 구원을 위한 대속적인 것이었나요? 아니죠.
그는 죄를 안 지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항변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결국 의인 욥도 고난 앞에서 자신을 깊이 낮추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반면,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전적으로 질적으로 우리의 것과 다릅니다.
그분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용서함을 받는 겁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것은 분명 하나님이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그렇게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겸손히 낮아져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기간으로 삼는 것이
좋습니다. 특정한 죄가 생각나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정결하다 하더라고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정금과 같이 단련하여 영혼의 순결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 영혼의 순결함을 얻은 사람은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영혼의 순결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죄함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깊이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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