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전도서강해(3)-웃으면 복이 오는가?(2:1-11)

등불지기 2012. 3. 7. 17:41

 

 

웃으면 복이 오는가?

 

 

본문: 전2:1-11

 

 

흔히 전도서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전도서는 솔로몬이 방탕한 삶을 끝내고 죽기 직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회개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전도서를 주의 깊게 읽지 않은 데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의 참회록이 아닙니다. 전도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혹은 하나님을 찾는 구도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도록 돕기 위해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순례하는 자들을 진리로 안내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1장에서 해 아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 안에서, 유물론적 세계관 안에서는 삶의 참된 만족과 의미와 행복을 결코 찾을 수 없다고 충격적으로 선언한 전도자의 말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 말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특히 패기와 투지로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창창한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충격적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란 말인가?’ ‘삶의 희망은 없단 말인가?’ ‘삶이 허무하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그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허무주의와 다른 것은 “해 아래서”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도자의 절망에 가까운 신음소리는 그 영혼을 하나님을 찾아 떠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곧바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최종 답은 전도서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최종 결론을 내리기 전에 전도자는 충분히 증명하고 입증할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1장에서 전도자는 “해 아래서 헛된 삶”에 대해 단호히 선언한 다음 이제 2장에 들어와서 자신이 한 선언이 결코 과장이나 이상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경험적으로 실험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제생활에서 실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에 인생은 너무나 짧고 시간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실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마음에서 할 수 있는 가상실험’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선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해 아래 새 것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2장의 초두에서 전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사람은 인생의 의미와 만족을 추구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생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한번 보십시오. 1장에서 배운 것은 “유물론적 세계관 속에서는 결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2장에서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참된 행복과 만족이 어디에 있는 지를 시험적으로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생무상에 대한 선험적 실험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런지 경험해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우리의 인생이 하나뿐이고, 이것저것을 시험하기에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절까지는 쾌락의 헛됨을 실험해보자는 것이고, 마지막 26절까지는 지혜의 헛됨을 실험해보자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1장을 확대 확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 전도자는 수고와 지혜의 헛됨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전도자는 2장에서 그 수고와 지혜가 왜 헛된 것인지에 대해서 증명하고자 합니다. 자, 사람이 수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낙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혹은 성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노력하는 이유는 성공하기 위해서이고, 성공하려는 이유는 나름대로 낙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분명 성실 근면하게 수고하는 자의 수고를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십니다. 전도자는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변명하거나 옹호하기 위해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자의 말을 게으른 삶을 변명하기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낙을 누리거나 혹은 성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인생의 참된 만족과 행복의 조건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도자는 지혜의 헛됨에 대해서 증명하기를 남들보다 훨씬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은 분명 성공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남들보다 더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반드시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수고로 복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후대에까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1장에서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평가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1절에서 11절까지 경험론적 세계관을 점검해봅시다. 정말 해 아래 새 것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경험적으로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어떻게 살아야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선 제일 좋은 방법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한없이 추구해보는 것입니다. 최대한 즐거움을 추구해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고, 가지고 싶고, 먹고 싶고, 편하고 싶은 등등의 여러 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욕구를 목표로 정해놓고 열심히 추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욕구이든 정신적인 욕구이든 간에 그 욕구(목표)가 채워질 때 잠시 행복감을 느끼겠지만 금방 실증을 내게 됩니다. 암논과 다말의 관계를 보세요. 솔로몬은 자기 형 암논이 한 죄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이 한 악한 일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웠을 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있었는가? 암논의 경우 자기 욕망을 채운 즉시 다말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으로 다말은 큰 상처를 받고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게 됩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경험적으로 (혹은 선험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15년을 달려 왔지만 목사가 되더라도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표를 정해놓고 열심히 달려가는 삶이 결국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는 순간 기쁨은 잠시 머물다가 금새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서 인생을 방황해볼 수 있겠지만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너무 길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동물처럼 자기 욕구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죽어버리는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이 분명하고 달성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목표지향적인 삶의 한계를 인식하자는 말입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나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자는 것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이 대학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대학진학에 성공한 다음 방황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학진학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진학한 다음에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목표를 발견해야 하는데 이것이 잘 안 됩니다.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가도 허탈해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목표를 새로 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웃음과 기쁨의 경험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2절,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사람은 웃을 때 행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기뻐할 때 행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행복할까요? 그런데 웃음과 기쁨은 일시적입니다. 그래서 헛된 것입니다. 웃음이 왜 미친 짓입니까? 이성을 잃어버린 광기나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이유 없이 웃는 것은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TV에서 유행하는 ‘개그콘서트’를 보세요. 많은 청춘 남녀들이 우스꽝스러운 개그맨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웃고 떠들고 박수치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웃고 있는 그들은 정말 행복할까요? 솔로몬의 눈에는 웃고 떠드는 모습이 마치 미친 자들의 웃음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눈으로 개콘을 보면 ‘이것은 미친 짓이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개그맨이 가장 행복해야 하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개그맨들이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많다고 합니다. 겉으로 과도히 웃는 사람을 보면 대게 마음에 슬픔이 감추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솔로몬의 눈은 정확합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이 그냥 웃고 떠드는 것은 미친 자의 웃음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실컷 웃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공허해집니다. 일시적인 카타르시스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웃음중독’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것은 진정한 카타르시스가 아닙니다. 마음의 스트레스를 벗어버리기 위해 일부러 크게 웃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공포영화를 보면서 괴성을 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쾌락에 빠져듭니다. 자기 자신을 쾌락에 방임하는 이유는 삶의 허무함, 스트레스, 무목적의식에서 오는 삶의 가벼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3절,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둘까 하여”

어려운 말 같지만 가만히 보면 단순한 내용입니다.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 될 경우 삶은 이중 잣대로 살게 됩니다. 내면의 공허함을 감춘 채 즐거움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미칠까요? 사람이 광인이 되는 까닭은 이중 잣대에 혼란을 겪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격이 분열되고 삶이 분열되는 이유는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쾌락을 즐기는 것이 삶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쾌락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인생이 미치게 되는 확률이 높습닏니다. 현실주의적인 사람이 미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 본문을 보세요. 마음은 지혜로 다스림을 받고 육체는 술로 즐겁게 하려고 했다는 것은 마음 따로 행동 따로 생활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몸은 유흥가에 다니면서도 마음은 순결하다고 주장하는 식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들과도 어울리면서 술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삶을 오랫동안 해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맞추어주는 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중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솔로몬은 인생에 참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삶의 중심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사업의 성공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4절에서 8절까지 볼까요.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남녀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사업하는 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사람이 열심히 사업하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업을 크게 한다고 인생이 크게 행복해질까요?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업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사업을 크게 확장하려고 애씁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위에서 성공했다고 말하는데도 본인은 정작 전혀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연봉 1억을 받는 사람이 10억을 받게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행복해질까요? 아닙니다. 왜냐면 연봉 100억을 받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연봉 100억을 받으면 행복해질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만족할 줄 모릅니다. 사업가는 결코 만족을 모릅니다. 매출 10억에서 100억을 달성했다고 행복해하느냐? 결코 아닙니다. 서업을 확장시킬 때 순간적으로 의미를 맛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순간적입니다. 전도자의 말대로 하면 헛됩니다. 그런데도 사업가는 순간적인 기쁨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쁨은 순간이고 나머진 부담감과 두려움과 심한 스트레스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이것은 일종의 노름(도박)과 같은 중독증세입니다. 사업을 크게 하면 위험이 뒤따르고, 적게 하면 경쟁에서 밀릴 것이라는 두려움과 걱정이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늘 따라다닙니다. 여러분은 일에 중독된 적이 없습니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인생을 본적이 있습니까? 궤도를 수정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인생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업하는 인생들은 계속적으로 일을 벌이고 확장시키지 않으면 불안과 초조로 견디지 못하는 것을 압니까? 이것은 ‘인생의 가속도 법칙’입니다. 이유를 알지 못하고 달리는 것입니다. 내심 불안하면서도 계속 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을 떠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달리는 것입니다. 갑자기 멈추면 모든 것이 박살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멈출 수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전해도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마음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력하지 말아야 합니까? 노력하면서 살 필요가 없단 말입니까? 이에 대해서 전도자가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봅시다.

9,10절,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수고를 마음으로 기뻐하라. 둘째, 수고로 얻은 축복을 하나님이 주신 분복으로 간주하라. 셋째, 그럼에도 그 복을 헛된 것으로 간주하라.

솔로몬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볼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모든 수고로 얻은 분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몫(분복)이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에 솔로몬은 그렇게 누릴 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복을 누리게 하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선 우리는 땀 흘려 수고해야 합니다. 오늘날 수고하지 않고 누리려고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태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땀 흘려 수고하는 의인의 수고에 복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고하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는 땀 흘려 수고하고 일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근면 성실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행주의나 기회주의를 거절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근면 성실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허황된 일확천금, 요행과 운의 복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불황은 바로 이것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건전한 투자가 아닌 투기심리와 욕심이 맞물려서 경제거품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의 경제위기는 땅투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땅값이 오를 것을 염두에 두고 은행은 대출해줍니다. 그러나 빚은 빚을 낳습니다. 부채를 통해 확장하는 것은 확장이 아닙니다. 땀과 피를 통해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요령과 술수를 통해 확장하는 것은 반드시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그런 현상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근면 성실이란 성품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분복과 사람이 수고하여 얻는 열매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라고 주시는 그것마저도 우리에게 참된 의미와 만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은총입니다.

 

이제 전도자가 경험한 결과를 봅시다.

11절,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이 누린 모든 것은 그가 수고하여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신 것이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누리라고 주신 분복이지만 다 일시적인 것임을 또한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땅에서 인생이 맛보는 모든 종류의 ‘축복들’은 잡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입김’과 같은 것임을 솔로몬이 발견했습니다. 죄로 인해 고생하는 인생들에게 잠시 허락해주신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더 많은 바람을 잡는 것처럼 보입니다. 단지 더 많은 바람을 잡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모든 수고가 바람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해 아래서는 인생의 수고와 그 수고로 인해 얻은 축복들 속에서도 참된 만족과 행복을 발견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삶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대답해주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위대한 복음전도자였던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인생의 참된 만족과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실 때만이, 그리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삶의 의미와 만족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저는 개그맨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얼굴을 TV화면에서 볼 때마다 ‘저 모습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배우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언어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거대한 공연장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대에서 연기하는 광대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감정을 몰입하기도 하고 그래서 광대들의 연기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광대놀음을 관람한 다음 밀려오는 허탈감과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또 다시 광대놀음판에 발길을 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역사상의 한 인물, 사람들은 그를 엑스트라로 여기고 주목하지 않았지만, 바로 그분 안에 인생의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비밀을 발견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