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하면 행복해지는가?
본문: 전2:12-26
지난 시간에는 경험론적 세계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인식론적 세계관을 살펴보겠습니다. 경험론적 세계관을 잘 나타내는 단어가 ‘쾌락’ 혹은 ‘즐거움’이라면, 인식론적 세계관을 잘 나타내는 단어가 ‘지혜’란 단어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내용은 즐거움을 목표로 살아가는 삶이 헛되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오늘은 지식과 지혜를 목표로 살아가는 삶 역시 의미가 없음을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진리는 이것입니다. 인식론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단어인 ‘지혜’ 역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무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12절에서 23절까지 살펴볼 것입니다.
12절,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
이제부터 솔로몬은 지혜와 망령됨이 어리석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솔로몬은 사업을 크게 하면서 인생이 경험할 수 있는 쾌락이 헛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사업을 크게 할 수 있었던 힘인 ‘지혜’가 헛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사업을 하는데 필수적입니다. 사업하는 분들에게는 지혜가 최고입니다. 학력은 없어도 지혜만 있어도 얼마든지 성공합니다. 지혜가 없이 사업에 성공한 사람을 들어보았습니까? 박사가 아니더라도 박사를 부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혜가 없으면 사업을 크게 할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돈의 흐름을 잘 압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방법 또한 잘 압니다. 이것은 책이나 학교에서 얻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써 사업을 크게 해보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기의 뒤에 일어날 자손이 무슨 일을 행할지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업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솔로몬의 화려한 업적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영 지혜가 없었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충고를 거절하고 자기 생각과 혈기로 밀어붙이다가 결국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선대가 이룩해놓은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게 됩니다. 이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아버지가 지혜로운데 아들은 그 지혜를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탁월한 지혜를 가졌지만 그러나 그 후손은 같은 지혜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만이 잘났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무엇입니까? 지식이 경험된 정보라면 지혜는 지식을 평가하고 통제하고 활용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복잡한 문제에 대한 시원한 해답을 내리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정보를 추구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세계무대에서는 경쟁력이 없습니다. 전도서를 묵상할 때마다 교육정책에 대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저의 막내딸이 학교에서 시험지를 가지고 집에 왔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숙제는 누구랑 해야 하나요? 제 아이는 “부모랑 같이 해야 한다.”라고 자신 있게 적었습니다. 그런데 틀렸습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정답은 “스스로 해야 한다”였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다릅니다. 학교는 결코 혼 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숙제를 학생들에게 내줍니다. 그러면서 답은 “스스로 해야 한다”라고 적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입니다. 또 얼마 전에 “집에서 자랑거리를 적으세요.”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딸은 “바로 나입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정답 중에 정답입니다.) 그런데 채점지를 보니까 틀렸다고 했다가 다시 정정한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적응하느라 고생할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정보위주의 교육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지혜를 추구하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학생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선생님께 질문하거나 반론을 펼치면 도전한다고 생각하고 일축해버립니다. 정보위주의 교육 때문에 그렇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지혜위주의 교육은 오히려 그렇게 자기 생각으로 반론하고 질문하는 학생에게 후한 점수를 줍니다. 선생을 당황하게 만들 정도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학생이 점수를 받습니다. 이것이 지혜중심 교육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정보위주의 교육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을 왕따시켜버립니다. 선생을 난처하게 만드는 학생은 모범생이 아니라 문제학생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어떤 획일적인 틀에다가 사람을 집어넣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 있습니다. 이 지혜가 물려질 수 없다는 데 비극이 있습니다. 선임자가 후임자에게 물려줄 수 없는 것입니다. 후임자가 선임자와 같이 동일하게 이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같이 경험할 수도 없지만 지혜는 특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혜는 갖는 것은 그 어떤 보석과 재물을 얻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돈을 갖는 것보다 돈을 버는 법을 아는 것이 다 낫습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문제를 풀어가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를 가진 사람은 남을 쉽게 설득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남을 쉽게 설득하거나 문제에 대한 대안이나 혜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혜를 가진 자의 후손이 자동적으로 지혜를 가진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아히도벨의 모략이 참으로 뛰어났지만 그가 똑똑하다고 그의 계략이 실천되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이 어리석기 때문에 뛰어난 모사가 실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아히도벨의 계략이 실패하도록 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보다 더 무서운 것은 기도하는 무릎입니다. 똑똑한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지혜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똑똑한 사람은 결국 자기 꾀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종말을 보세요. 발람의 종말을 보세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지혜자는 자기 꾀에 자기가 당합니다. 지혜가 참으로 중요하지만 지혜 자체를 너무 믿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너무나 부패하여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다. 이것은 똑똑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의 탁월성에 대해 인정해야 합니다.
13절,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솔로몬은 지혜의 탁월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돈, 권력, 지식, 명예, 등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런 것들보다 지혜가 더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무엇보다 지혜를 얻도록 하십시오. 지혜보다 더 값진 것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합니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반드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사업에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지혜의 한계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14,15절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
지혜가 이렇게 탁월하지만 그러나 그 종말은 똑같다는 사실을 솔로몬은 깨달았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으로 한꺼번에 지혜를 받았습니다. 그가 받지 못한 것은 연단입니다. 고난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는 그에게 없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얻어지는 이 지혜는 아주 특별한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은혜로 이러한 마음을 받을 수 있지만 고난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하게 됩니다. 아무튼 지혜를 얻기 위해서 솔로몬은 3년 동안 기도하는데 집중하면서 응답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간구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솔로몬 자신이 예상하지도 못한 축복인 지혜를 한꺼번에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축복은 실로 전무후무한 축복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거든,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도록 간구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서 구하지 말고 남을 섬기기 위해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기 때문에 응답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되지 못하는 대부분의 기도가 자기를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기도함으로 응답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처럼 연단을 받지 못했습니다. 고생하면서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된 대로 지혜를 얻었기에 성공할 때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믿고 온갖 일을 다 해보았습니다. 사업을 크게 벌였고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죄를 이기는 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연단에서 오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에 이기는 것은 세상적은 지혜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연단 받은 믿음으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종말을 생각하고서 그동안 ‘지혜’를 너무 과신했던 자신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지혜가 최고이지만, 그러나 지혜만을 고집하지 말기 바랍니다. 죄를 이기는 능력을 가지기 바랍니다. 이 지혜는 책이나 학교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지혜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16,17절,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솔로몬은 자신이 지혜만을 믿었던 과거에 대해 후회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지혜는 물려주는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혜로 큰 성공울 거두었지만 그 다음 대까지 계속 이어질 것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솔로몬이 삶에 대해 탄식하는 이유는 지혜를 가진 사람도 우매한 사람과 똑같이 죽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혜는 죄와 죽음에 대해서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사람이 똑똑하다고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다 죽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명철, 그것은 인생의 참된 행복과 만족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지혜의 한계는 또 있습니다. 지혜는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18,19절,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지혜로운 후계자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불안한 것입니다.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가는 비전기업을 경영하는 CEO들은 취임부터 후계자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르호보함의 관계를 보세요. 부모가 너무 뛰어나면 자식은 크지 못합니다. 큰 나무 아래 작은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어머니 밑에는 위대한 아들이 위대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아무튼 지혜자는 자기를 이를 후계자를 지혜자로 만들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혜자가 지혜로 많은 사업을 일으키고 팽창시켰다 할지라도 그 후세대가 그것을 관리하게 되기 때문에 도리어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진실로 헛되다는 것입니다.
20,21절,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똑똑한 사람은 언제나 미래를 생각합니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언제나 과거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그 후대를 항상 배려해야 합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기 때문에 오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업적을 이루는 것보다 그 업적을 관리할 사람을 만드는데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걸어간 길입니다. 다윗은 그 아들 솔로몬이 큰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 무단히 준비시켜주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고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22,23절,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여러분이 사업을 크게 하고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중소기업 중에서도 수백억의 매출을 올리는 분입니다. 서울대 출신이어서 얼마나 똑똑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분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밤에도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하여 업적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에게 진정한 소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면 죽을 때 그것을 가져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슬픔만 남을 뿐입니다. 반면 바울 사도는 복음으로 낳은 영혼들이 자기의 상급이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 앞에 그들이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죽을 때 가져 갈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최선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일에 대해 마음으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24,25절,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만족할 줄 아는 것이 행복한 삶의 기본입니다. 더 가지려고 더 받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무조건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자기 수준에서 자기 그릇에 맞게 자기 분량대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분량을 아는 지식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분량 이상의 믿음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유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릇의 용량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에 만족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제가 볼 때 한국사람은 자족하는 삶에 대해서 더 많이 배워야 합니다. 조그만 것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더 많이 가지려고, 더 많이 이루려고 하는데 이러한 것이 행복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 다음 최선의 삶이란?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26절,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지혜가 정말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문제를 만들고 푸는 능력, 상황을 만들고 파악하고 대처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혜를 어디에다 사용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노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죄인들은 수고로이 업적을 이루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업적을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나눠주신다고 했습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죄인들의 업적을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혜를 가지고 어떤 업적을 이루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과연 기뻐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런 나를 기뻐하고 계시는가 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주림과 목마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을 기억합니까?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말씀이 내 샘에 와 샘물을 마셔라
인생의 참 만족과 행복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하고, 더 학식이 많고 풍부하며, 더 똑똑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성취하고 업적을 이룬 사람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참된 삶의 의미와 만족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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