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선교지에 나오기 전에 한국 예수전도단에서 온 가족과 함께 3년 동안 DTS 훈련도 받고 지부에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제자훈련(BEDTS) 전임간사도 하면서 배우고 가르쳤던 내용을 1년 동안 설교해보았지요..
1년 동안 설교한 내용을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메시지] 혹은, [영성회복학교]란 이름으로 엮어보았습니다.
영성회복에 대한 메시지는 제가 그렇게 살기 때문에 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어서 전한 것입니다.
제 자신이 설교한 대로 살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솔직히는 그러지는 못합니다.
다만 종종 제 설교를 돌아보면서 제 자신을 점검하려고 애씁니다.
또한 선교사로서 아프리카에서 흑인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신학훈련을 하면서 지식전달에만 그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그들이 참된 영성을 이해하고 회복하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제가 했던 설교를 종종 끄집어 내어서 참고합니다.
그리고 참된 영성을 알고자 하거나, 그것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에게,
영성이 있는 교회를 위해 메시지가 필요한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 시리즈 설교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묵상1: 하나님을 누리는 사람
요10:1~10
오늘 메시지의 요점: 영성회복이란 관계훈련이다. 관계훈련 중 으뜸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훈련에서 핵심은 묵상훈련이다. 묵상훈련의 성공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데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영성회복의 첫번째 단추는 [묵상]에 대한 이해와 훈련입니다. 묵상은 기독교 영성의 첫 단추입니다. 그러나 묵상에 대해서 이해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분의 의도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원래의 의도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구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말씀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소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묵상훈련에 바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묵상훈련에 돌입하지만 실패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란 우리로 하여금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며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동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누린다experiencing God는 표현은 매우 도전적입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을 안다는 것knowing God"에 대해서 히브리적 사고방식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 보통 지식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삶은 진흙탕에서 나뒹굴고 있지만 자신은 구원받았음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교회 안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지식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표현보다 하나님을 누린다는 표현이 원래 하나님을 안다는 성경말씀의 뜻에 가깝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삶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고 이러한 공동체야말로 우리가 건설해야 할 모습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위해서 우리 주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9,10절)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꼴을 먹이러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단지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만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단지 구원을 얻는데서 더 나아가 꼴을 먹이는 데까지 관심이 있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만 아니라 그 생명을 누리는데 더욱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하시는 그 풍성한 꼴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만 아니라 더 나아가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생명을 누리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우리 주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나아가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얻고 또 어떻게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에게 어떻게 풍성하게 흘러들어온단 말입니까? 그것은 관계를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생명은 반드시 관계를 통해 흘러들어옵니다. 영성훈련이 있다면 그것은 관계훈련인 것입니다. 영성은 삶과 동떨어진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영성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이란 관계들의 총체이지요. 그러니까 영성이란 곧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이 관계는 생명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관계를 통하지 않고 생명이 들어오는 경우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관계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관계는 생명과 축복의 통로입니다. 관을 통하지 않고 물을 받을 수 없듯이 만일 관계가 단절되어 있거나 깨어져 있다면 생명수는 원활하게 흐를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저와 여러분은 이 관계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관계의 동물입니다.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는 크게 5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나와 나, 나와 너, 나와 세상, 나와 원수 마귀입니다. 저는 앞으로 일 년 동안 이 다섯 관계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이 모든 관계 중에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른 네 가지 관계에 비해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창세기 3장을 읽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단절되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부터 점점 다른 관계의 단절이 시작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관계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뿌리와 열매와 같습니다. 건강한 뿌리는 반드시 건강한 열매를 맺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면 그것은 다른 모든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1:6)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도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2:9-11)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6,27)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주님은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정립되었는지의 분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나가느냐 하는 것은 ‘행함’이요 ‘열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입술과 마음으로 단지 믿고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제로 생명을 흘려보내는 관계로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내게서 찾으시는 열매는 내가 다른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를 점검하고 정립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누리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바로 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풍성히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의도하셨던 바로 그 삶, 하나님을 누리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사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진정한 의도이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누렸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을 읽어보면 1,500년 역사에 하나님을 누렸던 사람 10명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공통적으로 ‘향수하고 죽었더라.’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진정 누리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계보를 우리가 잇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누리는 새롭고 거룩한 족속을 일으키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셨을 때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첫째가 ‘자기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즉, 그들을 불러서 전도를 시키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시키는 것이 그들을 부르신 첫째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부르신 주님의 첫 번째 소망은 그들과 단지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사역하다가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정작 중요한 주님과의 관계가 서먹해진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역은 잘 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결코 주님이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의 삶을 보면 그럴 때가 되면 주님이 당신의 사역을 가로막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이 어떤 분인지 깊이 생각해봅시다. 그분은 우리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구원뿐만 아니라 꼴을 먹여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생명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생명을 누리기를 진정 바라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더 나아가 누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오셨고,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두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첫째,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둘째, 양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는 삶을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목자로 인정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양의 문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양의 문으로만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에 적용해봅시다. 내 삶에 꼴이 필요합니까? 내 삶에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는 삶,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잠잠히 응시하는 것입니다. 잠잠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잠잠히 그분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선한 목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먼저 목숨을 내어놓으심으로 자신의 선한 목자이심을 입증해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양이 아닙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이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3-5절) 앞으로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할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은 양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삶의 핵심을 들라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문이요 목자로 간주하고 그분을 신뢰하면서 그분을 잠잠히 바라볼 때에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는 삶,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삶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회복학교]의 핵심원리이기도 합니다. 마귀는 이것을 방해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저의 삶 역시 이것에 대해 훈련 중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하나님을 누리는 삶의 필수임을 확신합니다. 제가 최근 깨닫게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 마음이 너무 분주하거나 너무 근심과 슬픔 혹은 낙심, 혹은 미움과 분노라는 감정에 눌려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뜸해지기 시작하면 나는 내 삶의 진정한 위기가 찾아왔다고 여깁니다. 분주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양의 문이신 그분을 잠잠히 바라보며 신뢰하는 것,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잠잠히 앉아 있을 때 그분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는 것,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훈련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것 없이 자신은 하나님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누린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법을 배우기 전에 다른 단계로 나아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지난 번 젊은이 예배에 참석했는데 다음 단계로 빨리 인도해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꽤 많이 손을 들고 기도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들이 하나님을 누리는 법을 배우고 익혀서 자기 것으로 삼기 전에 그들을 다음 단계로 인도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의 선한 목자이신 분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최선의 코스를 선택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좋은 꼴을 먹이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생명을, 아니 더 풍성한 생명을 나눠주기를 갈망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 이런 분이 또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보다 앞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최선의 계획과 스케쥴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을 맞추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누리는 법을 배우고 익히기도 전에 성급하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여러분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서 놀랍게 쓰임 받는 동안 하나님 자신과 멀어지는 것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원하는 결혼, 직장, 사역이 여러분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염려하지 않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주님께 견고함을 보여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곧바로 여러분을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에게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누리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누리는 법을 몸으로 익혔는가?’라고. 그리고 다시 주님께 아뢰십시오. “주님, 저는 그것을 알기 전에 다른 어떤 은혜도 구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저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그것을 배우기까지 다른 어떤 은혜도 저에게 주지 마십시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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