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을 위한 스물 네 번 째 메시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복을 의미하겠지요..
김광락 선교사 올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본문: 빌2:1-14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읽어보아도 얼마나 많이 마음을 강조하는지 여러분이 알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무엇보다 마음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위치한 곳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더 풍성한 삶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더 풍성한 생명은 어디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기 쉬운 것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삶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정의 문제를 겪고 있는 경우는 사실 돈이 없음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성령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집이 무너져 있지 않는지, 집이 반석위에 세워져 있는지, 그리고 집이 물이 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집입니다. 내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지, 거하신다면 어떻게 거하시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은 택할 길을 가르쳐보여주시며 당신의 친밀감을 보여주시며 영혼의 평안과 가정의 축복을 허락해주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단장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을 가장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은 가장 탁월한 기독론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통틀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처럼 교리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한 본문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지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고, 이런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예수님을 알고 있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아는 것은 생화와 조화의 차이만큼 차이가 큽니다. 여러분은 생화와 조화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냄새로? 꽃 냄새를 뿌려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화와 조화는 얼핏 구분하기 힘듭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생명의 차이입니다.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은 생화와 조화의 차이만큼 다릅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치 제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박찬호에 대해서 아는 것과 박찬호를 인격적으로 아는 것만큼 다른 것입니다. 하나는 일방적으로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는 매스컴이나 책을 통해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교제함으로써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수없이 들음으로써 우리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아는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많은 신학서적을 읽었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안다고 하는데 정말 아무 것도 므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왔고 또 알고 있다고 자부하더라도 한번쯤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나는 혹시 조화가 아닌가? 내게 생명이 없다면 나는 조화인 것입니다. 고전도후서 13장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8장 9절에서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조화인지 생화인지 스스로를 점검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가지고 매주일 공부하면서 내가 얼마나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스스로 진지하게 점검해보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모래위에 지은 집이 아니라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되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아는 것인지를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아는 것인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안다고 할 때 그 표지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5절을 보실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만 알고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과 상관없다면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고 선지자 노릇을 잘 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나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7:21-23)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내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구원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상관없이 살아간다면 우리는 구원을 이루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힘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을 배우고 연습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저는 세 가지 표지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첫째, 그것은 권리포기의 정신입니다.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리포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동일한 신성과 능력과 영광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심으로써 권리포기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리포기를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신 것이 바로 권리포기입니다. 권리포기를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바로 권리포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랑받을 권리가 있고 섬김 받을 권리가 있고 합당하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러한 권리를 존중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받을 권리가 있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를 무시하게 되면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뒤따른다는 것,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산다는 것은 그 모든 권리들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할 때 왜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권리포기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다툼과 허영으로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권리포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남을 원망합니까? 권리포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일을 할 때 시시비비를 따집니까? 권리포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대접받을 권리, 존중받을 권리, 섬김 받을 권리를 내세우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일을 할 때 특히 주님의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은 섬기려고 이 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받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소한 이 정도는...”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권리조차 예수님 앞에서는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리포기를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리포기를 내가 본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니까 권리포기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일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마음 한 쪽에 섭섭한 감정이 생긴다면 그것은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으려는 것, 모든 권리를 그분의 이름으로 내려놓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종의 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권리를 포기한 데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종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자발적인 종됨--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종이 되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의 심정으로 살아간다면 결코 상처받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종은 그 어떤 일을 하면서도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상처받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행한다는 증거입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어떤 말과 시험과 배반에도 결코 상처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면 종의 형체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즘 로마서를 공부하지 않습니까? 로마서 1장 1절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확고한 인생관을 보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인생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사람들의 종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을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의 인생관은 종이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주인노릇을 하고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결정하고 하나님보고 결제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음이 어렵고 힘든 경우는 모두 종이 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러한 상황이 가르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교만한 마음을 다루시기 위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보내주시고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배우기 전까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계속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종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이 된다는 것을 굴욕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사람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산다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는 삶이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 복종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에 집중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무엇에 복종하라는 말일까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WILL)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원망하고 시비를 가린다면, 또 다툼과 허영이 있다면, 누가 더 잘 했나 못했나에 관심이 많거나, 혹은 누가 잘 못한 것에 대해서 원인을 따지고 하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집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들과도, 심지어 당신의 제자들과도 다툼이나 허영이나 원망이나 시비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만 집중한다면 참된 경외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두렵고 떨리게 될 뿐 아니라 우리는 참된 기쁨과 소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단기선교를 취소했을 때 한편으로는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마음에 기쁨과 소원이 일어나야 하는데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획한 것이 실패하고 좌절하게 될 때 속상하고 섭섭하고 힘들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서 쉽게 털어버리는 법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까 안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해도 받을 그릇이 못되면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릇을 준비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여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겸손히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까지나 권리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까지나 종의 형체로 살기로 결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다리신 때는 어떤 때입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이쓴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2절)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를 겸손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상주심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사람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이나, 영광을 기대하면서 행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평가만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상주심만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주님의 마음으로 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행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한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다투게 되며 누가 더 잘 했는지 허영에 눈이 멀게 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되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으로 행하지 않을 때 우리는 누가 더 잘못했는지 원망하게 되고 시비를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대해서 예민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된다면 사람들의 평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시비를 걸고 따지듯이 공격해올 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여러분에게 섭섭한 감정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모든 다툼과 허영과 원망과 시비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지식, 그것은 그분에 대한 풍월을 가지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는 것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아는지 생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줄 모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그분이 보여주신 권리포기, 종됨,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상 주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권리포기를 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주님을 생각하면서 하늘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기쁨과 온전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자들을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때에 높이시고 상 주실 것을 바라보면서 참고 기다리는 것을 배우십시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한 배움의 과정이 없다면 결단코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줄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을 더 알기를 우리 모두 갈망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모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성회복학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복(26)-마음을 새롭게 하라 (0) | 2012.03.10 |
---|---|
회복(25)-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0) | 2012.03.10 |
회복(23)-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0) | 2012.03.10 |
회복(22)-영적전투II (0) | 2012.03.10 |
회복(21)-영적전투I (0) | 2012.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