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메시지 스물 다섯 번 째..
지금까지 회복의 큰 목표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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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대해 공부해봅시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
본문: 갈4:6,7
제가 최근 몇 주에 걸쳐 여러분에게 강조하는 단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란 단어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전이며 생명수가 흘러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며 온갖 행복과 축복이 담겨지는 그릇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 마음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음은 진정한 전쟁터입니다. 온갖 생각이 오고가며 교차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며 또한 원수 사단도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는 곳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진리의 말씀을 따라 가꾸십시오. 마음이 경직되거나 마음이 완고해지는 것을 무엇보다 조심하십시오.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기도한 것처럼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마음이 완고해지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생활과 환경에서 승리하여도 마음에서 패배하면 모든 것을 패배한 것입니다. 많은 부를 소유하거나 겉으로 괄목할만한 업적으로 칭찬과 주목을 받더라도 마음에 빈곤과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가득차 있다면 사실은 진정한 빈자입니다. 우리는 마음이란 전쟁터에서 승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집을 꾸미고 가꾸고 채우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단은 마음의 문제를 과소평가하게 만들고 외부의 문제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전장터에서 승리하고자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자는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5-17)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본문 모두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우리의 자녀됨을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두 본문 모두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람어 “아빠”는 오늘 한국어 “아빠”와 정확하게 동일한 발음입니다. 저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큰 축복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기도하실 때 아버지를 부르셨던 바로 그 호칭인 “아빠”란 단어가 오늘 저의 자녀들이 제게 “아빠”라고 하는 말과 같은 소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바 아버지”란 단어는 “아빠 곧 아버지”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호칭을 사용할 때 아빠면 아빠고, 아버지면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한 것은 왜일까요? 예수님께서 친히 기도하실 때 “아빠”란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헬라세계로 전파될 때 헬라사람들은 “아빠”란 아람어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헬라어에는 “아빠”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헬라사람들은 ‘파테르’란 단어를 사용하여 아버지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아빠 곧 파테르”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빠”란 아람어를 사용할 때는 언제나 ‘매우 가까운 관계’ 혹은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들과 한국사람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빠’란 단어를 사용할 때는 ‘사랑하는 친 아버지’와의 관계만 아니라 ‘친밀한 관계에 있는 할아버지’ 혹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스승’에게도 적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빠”란 단어에서 강조되는 것은 “친밀함”인 것입니다. 매우 가까운 관계, 그래서 친구처럼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단지 “아빠”란 단어를 사용하여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정말 궁금한 것은 우리 삶 속에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을 대하기 어려운 회사의 사장쯤 여기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여러분 자신의 “아빠”로 인식하게 되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나의 친한 아빠라고 인식하는 것은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이러한 인식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죄 없이 잉태되고 죄 없이 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인생도 하나님을 처음부터 친밀한 아빠로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완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인식하며 그렇게 느끼며 또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은 결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절)고 했습니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성령은 아들의 영입니다. 성령은 누가 보내십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십니다. 성령을 누구에게 보내십니까?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 그래서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가 된 자에게 보내십니다. 성령을 어디에 보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십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머무는 곳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 마음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예, 성령은 우리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봅시다.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오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성령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계시하여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친밀함에 대해서 계시하여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한 우정과 사랑의 관계로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진리입니다. 여러분 제가 설교제목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이라고 한 이유를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느끼게 하고 경험하여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은 우리의 모든 상처를 치유합니다. 성령은 또한 하나님을 친근하게 느끼게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십니다. 만일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느끼고 너무나 어렵게 느끼는 분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겸손하게 성령을 초청하십시오.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계시하여 주시도록 겸손하게 요청하십시오.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오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아들의 영을 구하십시오. 간절히 구하십시오. 힘써 구하십시오.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존귀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줄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우선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빠되심’을 내 마음이 인식하고 있는가? 혹은 내 마음에 하나님의 친밀하심이 있는가? 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 그리고 어두운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 하나님을 “내 아빠”라고 부르면서 견딜 수 있는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내 마음이 알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친밀감이 없을 때 내 마음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가? 내가 하는 일들이 아무리 내 생각과 계획대로 척척 잘 풀려나가고 또 만사가 잘 되는 것처럼 풀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친밀감이 없기 때문에 그 일들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안에서 나의 신분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생기는가? 세상이 나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나를 비웃고 조롱할 바로 그 때, 그래서 여지없이 내 자존심이 구겨지고 무너질만한 바로 그러한 때에 “그래도 나는 이래뵈도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외칠 수 있는가? 내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면 이 모든 물음에 “예! 그렇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예’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거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자신 있게 ‘아멘’이라고 답하지 못한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서 두 가지 원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영역 모두 치유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치유는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계시해주시는 성령의 은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첫째는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종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종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친밀함을 결코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종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종은 일 중심의 사림입니다. 종은 일을 하는 데서 안정감을 얻는 사람입니다. 종은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입니다. 종은 일을 잘 한다고 칭찬받는 것을 사명감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종은 지시받기 전까지는 결코 스스로 행하는 법이 없습니다. 종은 언제나 떠 밀려서 행하는 사람입니다.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법이 없습니다. 종의 사고방식은 이렇습니다. “나는 무엇인가를 잘 해내야 돼. 그래서 내 존재가치를 증명해보여야 해.” 그래서 종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시켜주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치가 없다고 여깁니다. 무엇인가를 잘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줄로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개’로 취급했습니다.
만약 종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사고방식을 벗어던지지 못하면 결코 성령께서 계시해주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느껴볼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여러분이 어떤 일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가 된다면 여러분은 성령께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종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특히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일수록 이런 종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89년부터 교역자생활을 해왔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일하는 데서 저는 저의 존재가치를 확인해왔습니다. “아, 나는 주의 종이야!” 이렇게 말이죠. 그런데 2005년부터 일 년 넘도록 목회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니까 저는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 나는 정말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것인가?” 왜냐면 무엇인가 바쁘게 일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동안 나의 정체성을 사역에만 두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역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까 저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사역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포기할 생각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은 제게 새로운 열정과 인내심과 비전을 부어주셨습니다. 전혀 사역을 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도 주님은 저를 사역을 위해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게 하셨습니다. 제가 배운 것은 사역이 없을 때 주님은 저의 사명을 새롭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명감은 사역할 때가 아니라 사역을 할 수 없을 때 주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제게 깨닫게 해 주신 것은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역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제가 오랫동안 놓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친밀감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밀감을 놓친 상태에서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주님이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주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내가 하나님을 ‘내 아빠’라고 부르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매우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종의 사고방식을 벗어던지기로 다시 한 번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교훈은 제 마음에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통해 내 자신을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아빠라고 부르며 아빠의 품에 안겨 기뻐 뛰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거나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편하게 살겠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가 아빠의 친밀감을 다시 확인한 이상 나는 더 과격하게 헌신할 생각입니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역으로 제 자신을 과감하게 던질 생각입니다. 나를 입증하거나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계시된 하나님 아빠의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종의 사고방식을 집어 던지시고 성령께서 계시해주시는 하나님의 친밀감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여러분은 진정한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안에서 성령께서 하나님의 친밀감을 드러내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기꺼이 핍박과 고난을 무릅쓰고 헌신할 결단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계시해주시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 번째는 마음의 상처입니다. 의외로 많은 분들이 부모님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육신의 부모만이 아닙니다. 모든 영적 권위자들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거나 혹은 누리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자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에 하나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자신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며, 인격적이지 못하고, 때로는 불합리하고 때로는 매우 엄격하고 까다롭고 가까이 대하기 어려운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아버지’로 영접하지 못하는 이유는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만약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이해하고 육신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축복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으로 금새 충만해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마음의 상처가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전부가 아닙니다. 이기적인 마음, 그리고 완고한 마음, 그리고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려는 죄, 그리고 우상숭배의 죄나 조상 때부터 내려져 온 속박 혹은 묶임 등도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음의 상처일 뿐입니다. 마음의 상처는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게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상처받은 영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듯이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이혼 한 경우 그 자녀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아버지로 영접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다정하고 인격적이고 온화한 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불행한 유아기와 아동기를 거친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아빠’로서 알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앞서 종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김의 대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친밀감을 알 수 없듯이, 권위자로부터 상처받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대할 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먼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다면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아버지에 대한 상처 때문에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다윗의 아내 미갈이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 춤추며 뛰노는 광경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기며 다윗을 조롱한 것은 미갈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일까요? 상처받은 순서의 역순으로 치유의 은혜는 흘러갑니다.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계시받을 때 치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이 세상에 계시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계시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할 때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계시 받을 때 우리는 그 어떤 상처가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을지라도 쓴 뿌리는 뽑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라고 제게 묻는다면 저는 예수님같은 분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신 것을 볼 때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을 위해 시간을 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매우 어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고아들에게 당신의 아버지 마음을 계시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막내인 다윗에게 다 맡긴 것입니다. 다윗이 쓴 시편에서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했다는 것을 가지고 다윗이 받은 상처를 설명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받은 상처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은 그 모든 상처를 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 어떠한 상처도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싸매시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아버지의 마음을 받을 수 있을까요? 몇 가지 단계가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내가 치유 받아야 할 필요를 느껴야 합니다. 병원과 의사들이 병자를 치유할 능력이 있어도 치료를 받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상처를 입었는데 내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치유 받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결코 아무렇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은혜를 필요로 하며 그 은혜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치유하시는 은혜를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정직해지는 것이 치유받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단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겸손하게 우리의 상태와 모습에 대해서 인정하며 치유하시는 은혜가 필요하다고 고백할 때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주셔서 내 모든 상처를 치유해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정직해지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서 은혜를 구하는 것, 이것이 치유에 가장 중요한 단계인 것입니다. 두 번째 치유의 단계는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좋지 않는 감정을 마음에 숨기고 살아가는 것은 마치 쓰레기를 방의 한쪽 구석에다가 계속 쌓아놓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은 쓰레기가 나를 질식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마음에 쌓여져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밖으로 끄집어 낼 때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마음에 쌓인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득 채우시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이 비로소 내 마음에 임해야 우리는 감정에 따라 사는 삶을 중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치유의 단계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소송이나 고소를 취소하는 법률행위입니다.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하지 않기로 공식 선언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내가 치유되고 내가 자유하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는 한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이 지속적으로 내 마음에 부어지기를 원할수록 우리는 지속적으로 용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치유의 네 번째 단계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잘못 반응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고, 자신이 주님의 뜻대로 반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을 또한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용서하는 것, 이 세 가지는 같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 째 단계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며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찬양하십시오. 노래하십시오. 그래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성령께서 보다 쉽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계시하여주실 것입니다. 여섯 째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계획과 목적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반응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유를 넘어선 회복의 단계인 것입니다. 일곱 째 단계는 참고 견디는 인내를 배우는 것입니다. 인내를 배우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종 인내하지 못해서 치유를 경험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나와 동일하게 상처받은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섬기는 삶을 살기로 결정하십시오. 내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 때 내 상처는 비로소 완벽하고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부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으로 채워지는 기도의 자리로 초청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십시오.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풍성히 계시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친밀함을 경험케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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