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관하여
저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속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다룰 때는 반드시 사고방식, 감정, 성품, 태도 같은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곧 우리의 감정과 사고방식에 있어서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에는 두려움fear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두 가지 원초적인 감정
두려움은 여러 가지 감정 중에서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감정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볼 때는 두려움은 수치심과 함께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최초의 사람이 범죄하였을 때 가진 두 감정이 수치심과 두려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so I hid."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being naked ==> being afraid ==> hiding in a dark room
수치심(shame)과 두려움(fear)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두려움fear은 수치심shame에서 시작합니다. 수치심은 의가 없음을 인식할 때 생기는 감정이고, 두려움이란 의가 없음에 따른 형벌을 인식할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두려움이 왜 사람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까요? 그것은 두려움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은폐'와 '엄폐'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가두어버리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한 걸음조차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기 때문에 매우 강력한 것입니다. 수치심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어두운 감옥에 자신과 이웃을 가두어버립니다.
아프리카에서의 수치심, 두려움, 그리고 감옥
아프리카에 정착한 백인들은 처음부터 흑인들과 싸워서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확보하고 확장하였기 때문에 백인들이나 흑인들은 서로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흑인 타운쉽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 백인들은 다들 저보고 아주 용감하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백인들은 흑인들을 억압했고 탄압했고 착취하였기 때문에, 또 흑인들은 억압과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서로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흑인 타운쉽에 자유롭게 출입하는데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면 한국 사람들은 흑인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흑인 타운쉽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사역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흑인들에게 한인들은 부끄러워할 역사도 없고, 흑인들에게 억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복을 당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그들을 피해 숨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역사 속에서 억압하고 착취한 역사가 있고 그것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견고한 요새 안에 숨어서 밖으로 나오거나 앞으로 전진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수치심과 두려움은 우리를 부정적 사고방식의 틀에 묶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출14:10~14
두려움은 사랑의 결핍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저는 두려움을 "사랑의 결핍"이라고 정의내립니다. 두려움이란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다면 빛 앞에서 어둠이 물러가는 것처럼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저는 어떤 모양으로든 내 안에 두려움이란 불청객이 갑자기 찾아오거나 혹은 스쳐지나간다면 "아, 내가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구나!" "내가 사랑으로 행하지 않고 있구나!" 라고 여깁니다. 사랑의 결핍으로 찾아오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면,사랑 안에서 온전해진다면, 우리는 하나님 한분 이외에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과 두려움은 상극관계
20여년 전 결혼했을 때 저는 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해 종종 집을 떠나 있어야 했습니다. 아내는 혼자서 집에 있었는데 제가 집에 없을 때는 친구를 집에 불러서 같이 지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첫 딸이 태어났을 때 더 이상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기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두려움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이곳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이지만 가로등이 많지 않던 옛날 밤길을 혼자서 걷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엄마는 밤길을 걷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만약 아픈 아기를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엄마라면 그 어떤 것도 두렵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갓난아기가 두려움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아기를 향한 엄마의 사랑이 두려움을 물리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과 두려움은 빛과 어둠처럼 상극관계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물러가고, 사랑이 결핍한 곳에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
그래서 사랑과 두려움의 관계는 빛과 어두움과 같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저절로 물러가듯이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은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도망갑니다. 내 안에 두려움이 있다면 내 안에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내 마음을 엄습해올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그럴 때마다 갓난아기를 품에 안을 수는 없겠지요. 성경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4:15-17)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능력이 됩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연습하기
따라서 두려움이 엄습해올 때마다 우리는 사랑을 연습해야 합니다. 사랑을 연습하십시오. 사랑을 연습하라니, 아니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연습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개념에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믿음이란 무조건 믿는 맹신blind belief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 안에 거하는 연습"입니다. 믿음이 커지고 견고해진다는 것은 연습을 통해 거하는 일이 쉬워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에 대해 좀 더 말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니까 33년 전이네요.) 저는 중학교부터 10 여 년 동안 토요일이 되면 산기도를 즐겨 떠났습니다. 작은 배낭에 모포와 성경, 그리고 빵과 우유를 넣고서 기도하러 산에 올랐습니다. 밤 10시쯤 되어 산길을 혼자서 오르는 것은 처음에는 굉장히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바람소리며, 나무끼리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 동물소리, 개구리 소리 등 온갖 소리가 들리고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산길을 혼자서 걷는 것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밤중에 혼자서 산길을 올라야 했을 만큼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많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무엇보다 절박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집에서 이불을 덮고서 잠을 자는 것보다 산에서 비닐을 깔고 이슬을 맞으며 추위에 벌뻘 떨어가며 혼자 잠을 자는 것이 더 평안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밤중에 산길을 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서웠지요. 그래서 캄캄한 밤중에 산을 오를 때에는 주로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서 가신 주를 바라봅시다." 라는 찬송가를 큰 소리로 부르며, 마치 군인들이 군가를 부를 때 팔을 크게 휘두르는 것처럼 저도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크게 휘두르면서 산을 오르곤 했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어둠을 노려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캄캄한 산길을 혼자서 걸어 올라가는 길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산 정상에서 비닐을 깔고 이슬을 맞아가면서 밤을 지새울 때 배웠습니다. 저는 그것보다 어둠을 상대하는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무서움 혹은 두려움이란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내 밖에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되었다고 여기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따뜻한 가슴에 안겨 있는 내 모습을 진심으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그리도 무시무시한 밤을 보내는 산꼭대기가 내가 평소 잠을 자는 안방보다 더 따스하고 더 평안하고 더 아늑한 곳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온 사방이 하나님의 따스한 품속과 같이 여겨졌을 때 그 평안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팔을 휘저으며 큰 목소리로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라고 소리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주님의 품 안에 젖 뗀 아이처럼 잠잠히 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밤중에 산을 오르는 것이 무서웠지만 자꾸 오르니까 나중에는 편안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한 번 거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반복적으로 거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온전히 이룬다"고 했는데 연습을 통해 온전해져야 합니다. 제가 강의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 이것입니다. Practice makes perfect! 믿음도 연습을 통해 성장하고, 사랑도 연습을 통해 완전해집니다. 두려움이란 감정을 피하지 말고, 직시하고 부딪혀보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커지고, 직시하고 부딪힐수록 작아집니다. 연습을 통해 두려움을 다루는 일이 수월해질 것입니다. (여기서 '연습'이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에 기초한 '사고방식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연습!! 이렇게 해보십시오.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먼저 성경을 통해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내어주셨고, 우리에게 의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수치와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수치와 형벌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이것이 아는 단계입니다 그 다음은 연습하는 단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나님께 나를 사랑하셨다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겨서 새근 잠든 아기와 같이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고 실제로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도 없고 형벌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는 단계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에 초점이 있다면 믿는 단계, 즉 연습하는 단계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기초하여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여기는가 하는 사고방식의 훈련에 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하기
두려움에 대처하고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 안에 거하는 연습과 함께 또 다른 연습이 있는데 하나님의 임재연습입니다. 사람은 여럿이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더 쉽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두려움을 잘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모든 사람은 홀로 있을 때 두려움에 취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을 믿고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기는 regarding 것을 삶속에서 반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연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은 두려움에 대처하는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란 책은 매우 작은 책이지만 그 내용은 매우 무거운 도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성경이 강조하는 메시지입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사43:1-3)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을 때 두려움은 우리를 떠나갈 것입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Do not fear, for I am with you. 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도 임마누엘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 최고의 행복은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를 지나는 배 위에서 편히 주무셨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마태8장) 제자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갈 것을 아시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32)
하나님께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5-7)
여호수아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두려움을 치워버리지 않는다면 그가 이끄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두려움을 내버려두게 되면 두려움은 우리를 부정적인 사고방식의 감옥에 가두어버릴 것입니다. 두려움이 주는 영향력은 매우 커서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감정입니다. 두려움은 자신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약속의 땅으로 전진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힘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은 영향력뿐만 아니라 전염성도 가장 강한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것과 조심성이 없는 것은 다르다
이슬람권 국가들이 많은 서부와 북부 아프리카는 상대적으로 치안이 안전한 대신 보안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반면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의 경우는 치안이 대개 불안합니다. 밤에는 함부로 돌아다니면 위험하고, 낮에도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두려움이 없다고 해서 함부로 다녀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이 없다고 해서 주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치안이 불안한 밤길이나 흑인 마을에 돌아다닐 때는 긴장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해서 조심성을 갖지 말고, 주의하지 않아도 되고, 긴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 극복하기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시골 구석구석 찾아가서 성경을 가르치고 신학교육을 통해 지도자를 키워내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낯선 마을로 들어가면 긴장이 되고 살짝 겁도 납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자훈련클라스를 개척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먼저, 특정 지역을 놓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다음은 지역을 축복하면서 몰래 둘러봅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함께 동행할 현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그 지역에 들어가지 않고 현지인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을에서 훈련모임이 시작되는 것을 기뻐하신다면 반드시 돕는 현지인을 붙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게 해주실 때까지 특정 마을을 놓고 기도하고 또 리서치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사람과 함께 당장 일을 벌이려고 하기 보다는 그 지역에 대해 충분히 듣고 배우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지역에 아무 두려움이 없이 출입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낯선 직장, 낯선 환경, 낯선 동네, 낯선 사람을 대상으로 일하게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다면 모세가 그러했고 여호수아가 그러했듯 일단 몰래 정탐(리서치 작업)을 하십시오. 그리고 충분히 알고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면 그곳(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지가 두려움을 만들고 두려움이 부정적인 태도를 만들기 때문에 먼저 충분히 사전답사(리서칭)를 하는 것은 편견과 선입견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매스컴과 거리를 두라
세상의 사건 사고를 전파하는 매스컴을 보고 있노라면 온통 걱정 근심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작은 문제도 심각하게 보도하는 매스컴의 영향에 끌려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과 담을 쌓으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차라리 뉴스를 보지 말고 신문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신문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몇 가지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얼마 전 라면에서 발암물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으로 전국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습니다. 문제를 이슈화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에 매스컴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데 아주 능통합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안 먹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인 줄 알고 믿음으로 감사하며 또 절제하며 먹는 것이 훨씬 몸에 좋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두려움을 주는 정보원information source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진리를 알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모든 두려움은 왜곡된 진리, 잘못된 정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주는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요8:32참조)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P.S.참조로, [안정감]에 대한 저의 글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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