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에 관하여
지난번에 올렸던 글에서 [두려움]은 [수치심]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부끄러움]이란 감정에 관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수치심: 원초적인 감정
앞에서도 말했지만 두려움fear과 수치심shame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감정이며, 특히 모든 부정적인 감정과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뿌리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수치심shame은 가장 근본적인 감정입니다. 왜냐면 수치심이란 의의 결핍을 인식할 때 생기는 감정이며, 두려움이란 의의 결핍에 따른 형벌을 인식할 때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3:7)
수치심과 죄책감은 서로 같다
일반적으로 수치심을 정의한다면, 적절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일을 행하였을 때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 혹은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수치심은 일종의 죄책감 혹은 죄의식sense of guilty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책감은 모든 부정적인 감정, 사고방식, 행동양식을 만들어내는 뿌리root of all negatives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의식이란 뿌리에서부터 죄악된 사고방식과 부정적인 감정 그리고 부정적인 행동이란 열매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가지고 공기도public prayer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수치심은 특히 종교적인 사람들, 즉 규율을 강조하고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나 혹은 금욕주의적인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는 감정입니다. 심지어 교회생활을 충실하게 잘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조차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일 오전 예배 때에 대표기도를 하는 분들을 가만히 관찰해보십시오. 대부분 그들의 기도에 꼭 빠지지 않는 기도가 "수치심에 견딜 수 없어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선언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그리스도를 경축하고 기뻐하며 승리를 선포하는 기도가 아니라 '지난 주간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라고 자조적인self-scorning 태도로 기도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자조적인 기도를 주일예배 시간에 하는 것을 들을 때 너무 답답하고 속이 상합니다. 수치심을 가지고 공기도를 하는 것을 저는 너무 싫어합니다. 저는 공기도를 가르칠 때 '수치심'을 가지고 기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배를 망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주님 앞에 해야 합니다. 대신 공기도에는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고 경축하여야 하며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사이비 기독교에 대해 경종을 울려야 한다
수치심을 의의 결핍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의의 결핍으로 사람들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죄책감은 모든 감정에 영향을 주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벌받아 마땅한 죄인처럼 느낍니다. 하나님은 벌주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여깁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우리의 의가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로 인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수치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수치심이 만들어낸 종교는 율법주의 종교이지 기독교는 아닙니다.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수치심을 제거하고 도려내는 의의 복음에 서 있지 않으면 비록 기독교의 모습을 띄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이비 기독교입니다.
수치심을 가지고 동기부여하려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수치심(혹은 죄의식)을 주어서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가정과 교회와 학교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수치심을 주어서 공부를 하게 합니다. 학교에서는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수치심을 주어서 공부할 동기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비교함으로써 수치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조차 수치심을 가지고 열심을 내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수치심을 준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수치심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깨뜨립니다. 수치심을 줌으로써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깨어지고,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단절되고,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멀어지며,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서먹해지기 시작합니다. 수치심은 행동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소중한 관계를 절단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수치심을 주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수치심을 주는 것은 그 의도가 어떠하든지 결국 소중한 관계를 박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수치심을 주는 말과 행동 앞에 가리거나 숨지 않는 사람이며, 수치심으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가정, 학교, 직장, 교회의 특징은 수치심을 갖지 않도록 서로 배려하는 것입니다.-벧전4:8
오직 의의 복음뿐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은 나의 부끄러움을 제거하는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수치심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수치심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부끄러움을 제거하는 능력입니다. 모든 부끄러움을 제거하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이 어떻게 사람들의 수치심을 제거할까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됩니다. 그것은 최초의 사람이 범죄하기 전에 그들에게 입혀져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취하는 사람은 모든 수치심에서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의가 수치심을 가려주는 의복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라
다윗은 이 수치심을 다룰 줄 알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시25:1~3) 다윗은 수치심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이 믿은 하나님은 수치를 가려주시는 하나님이시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의 삶은 어릴 적부터 수치심과 씨름하면서 살았습니다. 막내로 태어난 다윗은 형들에게 늘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은 그를 놀리기 좋아했습니다. 다윗에게 수치심은 언제나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믿은 하나님은 수치shame를 당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수치심은 모든 관계의 적이다
최초의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가졌던 최초의 감정이 바로 "수치심"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의가 박탈당했기 때문에 오는 감정이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숨기 시작했고(엄폐-hiding),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은폐-covering). 엄폐와 은폐는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행동양식입니다. 이 수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즉각 자신과 한 몸과 같은 사람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원래 친밀함은 수치심으로 대체되고 말았고 수치심은 또 다른 관계단절의 아픔을 낳고 말았습니다. 죄의 영향력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직도 수치심 속에 고통을 겪고 있으며 또한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줌으로써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이 수치심은 모든 관계의 원수이며 모든 상처의 뿌리입니다. 이 수치심을 근본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의를 붙잡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수치심의 근원적인 치유를 가능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깨어진 관계에서 친밀한 관계로 회복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붙들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 모릅니다. 이 의를 발견하고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의는 최초의 사람들이 범죄하는 순간 벗겨진 것입니다. 이 의는 최초의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운 의복으로 입혀졌던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타날 뿐 아니라 그것을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된 소식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려주신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어주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의를 의복과 같이 옷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영광으로 입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빠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품에 달려갈 수 있습니다.
내가 불완전하다고 느낄 때
수치심이란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형벌을 받을 것이란 두려움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치심과 두려움이 항상 같이 붙어다니는 이유입니다. 비록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살아가면서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고 부족하며 실수와 허물투성이인 존재임을 자주 느낍니다. 특히 실수를 저질렀을 때 혹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밀려오는 수치감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다른 일반인보다 큰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재빨리 수치를 가려주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고백하며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함에 대해 당당하게 인정하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결코 변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어떤 허물이나 불완전한 모습이 보인다면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것을 인정하십시오. 그것을 숨기거나hiding 혹은 가리려covering 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시인하고 그것을 고백하고 그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사람이 했던 것처럼 가리고hiding 숨을covering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사람들이 나의 허물을 보고 비웃을 텐데요?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 나의 수치를 가려주시는 하나님, 불완전한 나를 완전하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게 될 때 그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허물을 지적할 때 혹은 스스로 불완전한 모습 혹은 허물많은 모습을 볼 때 이렇게 말하십시오. "그래, 맞아요! 이게 내 모습이에요. 저는 지금 완전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바라볼 거에요. 나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거에요. 내가 사랑하고 내가 믿고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나를 완전하게 하실 분이니까요. 나의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게 하지 않으실 분인 줄 나는 믿어요~"
수치심은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
수치심을 걷어내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담이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탓하며 원망하게 됩니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왜 죽였습니까? 바로 수치심 때문입니다. 수치심은 이처럼 책임을 전가하게 되고 혹은 자신에게 아무 해도 가하지 않은 사람을 공격하여 해를 입히게 만듭니다. 사무엘상 1장에서 브닌나를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에게 수치심을 주어서 공격합니다. 이처럼 수치심을 주는 것은 복음의 원수가 즐겨하는 짓입니다. 원수의 전략은 수치심을 주어서 관계를 깨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수치심을 제거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수치심'이란 감정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치심은 반드시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버려두게 되면 그 수치심이 나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게 되고 그래서 나는 엄폐hiding와 은폐covering하여 자신의 삶을 왜곡시켜 버리게 되고 하나님과 타인과의 관계마저도 위태롭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어느 날 갑자기 불화하고 관계가 틀어져버리게 된 것에 대해 이유를 알지 못하여 당황해 할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이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수치심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믿는 부모가 자녀에게, 부부가 서로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목사가 교인들에게 알게 모르게 수치심을 주면서도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 중에 대단히 심각한 아이러니입니다.
건강한 수치심도 있다
우리가 수치심을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고 해서 모든 관계 속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제 글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루어야 하고 치유해야 하고 직면해야 하는 수치심shame은 죄의식sense of guilt 와 관련이 있습니다. 반면에 건강한 수치심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2:9에서 여자들에게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이 아니라" "염치와 정절로 자신을 단장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수치심은 우리를 더욱 아름답게 해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서 13절을 보면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사역자들의 특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거짓 교사들과 거짓 사역자들의 특징으로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증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권위자가 아무리 문제가 많더라도 그를 함부로 비방하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권위를 업신여기는 일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데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사역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권위자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비난하고 판단하는 말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함부로 남발하는 것이나 내일 일을 자랑하는 것이나 자신의 장래계획을 떠들어대는 것 역시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분수와 분량을 넘어서는 말과 행실 역시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 모든 수치심은 건강한 수치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건강한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고, 혹은 나름대로 신령하다고 해서 염치도 없이 뻔뻔스럽게 말하거나 행동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성경이 정죄하는 거짓 교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소중한 관계를 깨뜨리는 모든 잘못된 수치심은 직면하고 드러내고 다루어야 하지만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건강한 수치심으로 자신을 단장하면서 살기를 소원합니다.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P.S.
수치심shame은 수퍼맨 조차 움추러들게 만듭니다..
원수가 내 곁에 다가와서 Shame on You!! 라고 비난할 때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왜냐면 복음은 나의 부끄러움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라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줄 알아"라고 핀잔을 주기보다는
허물을 덮는 사랑으로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라고 격려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수치심에 대해 더 알기 원하신다면
영성회복학교에서 33번째 설교인 [수치심의 치유]를 읽어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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