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름에 관하여(2)
계속해서 요한복음 4장을 가지고 '목마름'에 관하여 묵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은혜를 알아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샘물이 되리라.”(요4:13,14)
우리가 무엇인가를 소유하기를 간절히 열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망을 갖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님께 달라고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혜를 경험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시려고 하는 선물은 육신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그런 물이 아니었습니다. 일시적인 만족감을 주는 그런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선물은 ‘생수’water가 아니라 ‘샘’spring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 자신이 그 여인에게 영원토록 끊임없이 생수를 공급하는 ‘샘’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샘을 소유한 인생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약속인가요?
과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종종 샘spring보다는 샘물water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얼굴보다는 하나님의 손을 간구합니다. 하나님 자신보다는 하나님께서 내 삶속에 대박을 터뜨려주시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로또에 당첨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내 야망과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 나의 종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이용하려고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은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목마름이 샘물에서 샘 그 자체로 돌아서야 합니다.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려고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 정확이 알지 못하고 있지만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물을 제게 주십시오.”Give me this water! 은혜는 간구해야 옵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았는데도 은혜를 받는다면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구했기 때문입니다. 받지 않음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칼빈주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크다고 해서 간절히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전도나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시면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전도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는 것을 안다고 해서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주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있어도 열심히 간구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려고 하는 생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런 물을 제게 주십시오.”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간구해야 옵니다.
목마름의 뿌리를 발견해야 한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요4:16)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생수를 어떻게 주셨을까요? 예수님은 엉뚱하게도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남편과의 문제가 그 여인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던 목마름의 원인임을 간파하셨습니다. 여인은 “저에게는 남편이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인의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제가 어릴 적부터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여러 목사님의 설교는 언제나 이 여인을 남자를 ‘밝히는’ 부도덕하고 음탕한 여인으로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당시 문화적인 배경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편견이요 오해입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요..형제들이 살았는데 맏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계대결혼법’이라는 풍습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있었고, 사마리아에도 있었고, 한국의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문화, 혹은 가문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 가운데 이런 관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슨 일이?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그녀는 어느 가문의 맏이와 결혼했는데 그만 그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문을 잇기 위해 둘째와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결혼을 다섯 번 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자신과 결혼하는 형제들은 하나같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래서 대를 잇긴 해야 하는데 또 죽을까봐 결혼하지 못하고 마지막 형제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남편이 아닌 것입니다. 형제의 가족이나 친척이 정식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가 창세기 38장에 나오는데요..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같은 이유로 그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이런 계대풍습에 관해서는 창38:11, 26절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이러한 풍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마태복음 22:23-26절에 잘 나와 있지요.. 얼마전만 해도 우리 나라에도 있었던 풍습입니다..예전에 제가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요..사마리아인들이 문화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도덕적인 기준과 규율이 있었고 자기들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결혼하는 풍습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시대처럼 한 여자가 여러 남자와 결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 당시의 문화 역시 매우 보수적이어서 여자가 자기 마음대로 결혼을 여러번 하고 남자를 바꿀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중동지방에서 한 여인이 실제로 5번이나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남자를 여러번 바꾸는 일이나 또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남을 임의로 선택하는 것도 지금 사마리아인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근동지방 어디에서도 불가능하였고, 만일 정말 사마리아 여인이 성도착증 여인이었다면 아마 당시 주민들에 의해서 벌써 돌에 맞아 몇 번 죽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인을 을 보고 남자를 추구하는? 성도착증 환자로 매도하는 것은 할리웃 영화나 미드를 너무 많이 본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인 것입니다.ㅎㅎ) 그래서 아마도 그 여인을 바라보는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의 시선은 이랬을 것입니다. “봐, 그 여자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있어..그녀와 결혼하는 형제마다 다 죽어나가니 말이야..쯔쯧..”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던져지는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이 큰 스트레스가 되었고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피해 한 낮에 우물가를 찾은 이유였습니다. 이상은 제가 추론해낸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기구한 인생이 얼마든지 주변에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도와 아무 상관이 없이 고통의 굴레를 쓰고 고통당하는 인생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편견에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상종하지도 않고 있고, 그 자신도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움츠러든 채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사마리아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다른 정상적인 이들보다 훨씬 더 복음을 잘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여인은 자신에게 드리워진 삶의 고통을 정확히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보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에게 있는 고통이 너무나 심각한 것이지만 너무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직시하지 않고 무시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너무 큰 고통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일부러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약속한 생수를 맛보여주시기 위해 그 여인이 그동안 열심히 회피하려고 애써왔던 고통의 본질, 고통의 근원을 과감하게 끄집어 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기 전에 우리에게 있는 진정한 목마름이 무엇인지, 그 목마름이 어떤 고통에서 비롯된 것인지, 목마름의 뿌리를 우리에게 정확히 보여주셔서 아픔을 직시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생수를 경험하기 직전에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암환자를 고치기 위해서 암세포를 칼로 도려내고 들어내어야 하듯 생수를 주시기 위해 목마름의 원천인 고통의 문제를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는 갈망으로 전환해야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이제야 비로소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진정한 목마름이 무엇인지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고통의 근원은 정확히 드러내신 예수님께 엉뚱하게도 “어디서 예배드려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목마름의 정체를 정확히 알게 되고서 자신의 삶을 창조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의 말은 이렇게 풀어볼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왜 그러한 고통이 제 삶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를 그렇게 만드신 창조주를 만나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만나서 나의 목마름을, 나의 고통을, 나의 삶을 하소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저는 이것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하고 있던 질문의 내용이라고 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제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과 목마름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수의 은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내 삶의 문제에 대해서 내가 간구했던 ‘남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임을,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임을,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 삶에 드리어진 고통을 풀어내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음을,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목마름이 있음을 예수님께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목마름,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목마름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향한 갈급함, 이것이 우리가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믿음입니다.
장소가 문제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요4:21-23)
내 삶에 드리어진 고통의 그림자를 하소연하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야하겠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라는 여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장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예배시대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새 시대의 예배본질은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리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새로운 예배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살아계신 하늘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찾으신다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놀라운 비밀은 이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고 계셨고 또 찾아내셨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야하겠다는 부담감을 느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하겠다는 갈망을 가진 인생은 하나님이 친히 찾으시고 또 찾아내십니다.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에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아도 모든 인류는 이미 죄와 죽음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들이 있었다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든 찾아내시고 복음의 말씀을 들려줄 사람을 보내셨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마리아 여인에게 보내주신 것은 그 여인이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의 본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많은 목사님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예배에 관해 설교를 합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맥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전체 그림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주신 말씀의 핵심은 이제 장소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어떤 분들은 이 문제 때문에 교회를 옮겨다니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야 은혜를 더 받고 어디를 가면 은혜를 덜 받는다는 사고방식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좋다고, 혹은 설교가 졸린다고 교회를 옮겨다니는 분들은 아직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고 예배의 본질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무교회주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장소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언제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니라”
사마리아 여인은 이제 생수의 근원에 좀 더 다가서게 됩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4:25) 여인이 배우려고 하는 것은 어디서 어떻게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지식에 관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가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다”I who speak to you am he!!라고 대답해주십니다. 이 말씀 한 마디에 여인은 이미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열망하고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 그토록 간절히 목말라 했던 것이 홀연히 그리고 충격적으로 충족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것이고, 이제 그녀에게 드리워진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히 샘솟는 샘물의 근원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향한 목마름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고 목말라 했는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경험한 목마름은 사울의 추격과 핍박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만날 것을 그 누구보다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뻐하신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목마름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인생이 얼마나 위대한가는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거나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얼마나 간절히 찾고 있느냐,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대해 얼마나 목말라 하고 있느냐, 그 목마름의 깊이와 크기에 따라 그의 영적인 크기와 깊이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엇에 목말라 하는가?
사슴이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죽음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목마름을 해결하지 않으면 그 조바심으로 인해 몇 시간이 안 되어 죽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죽음’을 느끼면서까지 갈급해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내 생명과 바꿀 정도로 갈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이러다가 죽겠다’고 싶을 정도로 갈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생수의 근원이시며 영원한 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겐 목마름이 없어요!!’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 목마름이 없이 살아가는 영혼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자신의 목마름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뿐이고, 직시하기를 두려워서 회피하여 왔을 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혼의 목마름, 원초적인 갈망, 근원적인 갈증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주기도 하고 또 받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악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갈급함에 반응하여 주십니다. 단지 생수를 주시는 일시적인 해갈이 아니라 친히 영원히 솟아나는 샘이 되어주시는 방식으로 해결해주십니다. 우리 안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주십니다. 우리의 생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이 샘에 오면 다 마시겠네
이 샘에 솟는 물 강같이 흘러 온 천하 만국에 다 통하네 빈부나 귀천이 분별이 없이 다 와서 쉬고 또 마시겠네
생명수 샘물을 마신자마다 목 다시 마르지 아니하고 속에서 솟아나 생수가 되어 영원히 솟아 늘 풍성하리
이 샘의 이름은 생명의 샘물 저 수정빛같이 늘 맑도다 어린양 보좌가 근원이 되어 생명수 샘이 늘 그치잖네. Amen..
(526장 )
남아프리카에서,
생명수 샘가에서 늘 놀고싶은..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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