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신앙
믿는 자의 행함action에 대해서 묵상해보았습니다.
두 번에 나누어서 글을 올리겠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신앙이란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가 끊임없이 움직이듯이 행동action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모든 것은 움직임이 없습니다. 죽은 신자나 죽은 교회도 움직임이 없습니다. 입은 살아 있어도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행동은 단지 움직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떠밀려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생명없는 물건도, 죽은 시신도 자극을 주면 움직입니다. 생명있는 모든 것은 ‘능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보세요. 죽은 물고기는 물결을 따라 흘러갑니다. 움직이고 있지만 그러나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물고기는 언제나 물결을 거슬러서 움직입니다. 같은 움직임moving이지만 하나는 대세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세를 거슬러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행동이란 대세를 거스르는 움직임을 뜻합니다. 우리가 산 믿음을 가졌다면 반드시 산 행동을 보여줌으로 스스로 입증해보일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행동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4)
어떤 일을 결정하려고 할 때 신중한 것은 좋지만 너무 신중하여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신중한 사람들의 특징은 두려움이 많다는 것입니다. 행동하기 위해 적당히 무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로써 무엇인가 일어나게 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은 “..말한 대로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도 일종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말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태산을 향하여 들리어 바다가 던져지라고 명령하는 것은 보통사람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말,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 이것은 고차원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일을 만들어내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말들은 그 자체로 아무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말로만 사랑을 베풀 수 없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약2:15,16)
말로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알면서 사랑이 필요한 세상의 가련한 영혼들과 족속들에게 아무 것도 행하지 않거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알면서 공의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이들과 함께 고난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자비를 사랑한다면 자선단체에 소속되어서 활동해야 하고, 공의를 사랑한다면 공의를 사랑하는 시민단체에 소속되어야 활동함으로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선교를 사랑한다면 선교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거나 장단기선교사로 헌신하거나 혹은 어떤 모양이든 후원함으로써 운명을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거창하게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조용히 행동에 옮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말 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는 조용히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실제적인 행동이어야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4,16)
행동하는 신앙이란 다름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 줄 아는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무엇보다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help과 혜택benefit을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강단에서의 설교 역시 그 무엇보다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청중들은 그것이 지금 내 삶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속으로 반문하고 있다는 것을 모든 설교자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실제적이지 않는 것은 기독교적이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어주셨듯이 우리 또한 다른 이들에게 실제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설교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회중의 자리에 들어가셔서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시고 그들의 아픔을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사역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으셨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와 병든 자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실제적인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주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 모든 것이 위선이요 혹은 잔소리가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부모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행동은 결국 내가 믿고 있는 것의 결정체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나의 아내나 나의 딸들이 만일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내 행동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존경하는 이유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 때문이고 존경하지 않는 이유는 내 말과 행동에 일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더 이상 우러러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인 줄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많이 알고 있는 것이 대단한 줄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성경을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읽을 줄 알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차라리 성경의 원어를 전혀 모른다 할지라도 행동하는 신앙이 더욱 보배로운 것입니다. 책 속에 파묻혀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고상한 줄로 착각하며 살기 쉽습니다.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됩니다. 제게 신앙의 첫 멘토이셨던 분은 과거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분이셨습니다. 한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분이셨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성경을 탐독하다 스스로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깨우치셨습니다. 그분은 성경을 원어로 읽을 줄은 모르셨지만 탁월한 비유를 가지고 아이들을 잘 가르칠 줄 아셨고 틈만 나면 전도지를 들고 밖에 나가서 예수님을 전하셨고 비록 평생을 가난하게 사셨지만 손님을 후하게 대접할 줄 아셨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길 줄 아셨습니다. 많이 알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런 영향력도 없고, 실제적인 섬김을 베풀 능력도 없는데..많은 지식이 많은 믿음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차라리 적게 알고 제대로 행동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나중에 심판날에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큰 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귀신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귀신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귀신도 신학자들이 갖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예배인도자들이 갖고 있는 감정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것은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 행동하지 않는 감정,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귀신의 수준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척도는 지식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청년의 신앙은 헛된 것이다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전11:10)
저도 대학부와 청년부에서 회장으로 섬겼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부와 청년부를 교역자로서 섬겨보았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청년의 신앙은 다 헛된 것’이란 것입니다. 20대에 신앙생활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20대에 가졌던 지식과 믿음은 자신의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20대에 많은 것을 듣고, 많은 것을 배우며, 많은 것을 느끼며 기독교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립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하지만 30대에 직장생활 혹은 가정생활을 하면서 진짜 자신의 것만 남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은 다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40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저런 실패도 경험하면서 진짜 자신의 것으로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열심히 청년부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을 보면 한 편으론 감사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과연 저 열정이 30대와 40대의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유지할 수 있을까 매우 의심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직장생활하면서 경건생활 포기하고, 시집살이와 사업의 실패나 정리해고 등을 경험하면서 진짜 ‘본색’을 드러내는 청년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시련기를 겪으면서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아야 사람은 자신의 진짜 본래 모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됩니다. 바닥생활을 해보지 않으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곧 자신인줄로 착각하며 자신이 세상을 변화시킬 줄 알며 기고만장하게 되지요. 그러나 맨 밑바닥에 내려앉게 되면 비로소 자신이 진짜 알고 있는 것과 진짜 믿고 있는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신의 진짜 정체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러한 고비를 몇 번 경험하게 되면서 우리는 진짜 내가 아는 것,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한 밑바닥은 20대에 결코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30대 후반이나 40대에 찾아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20대의 신앙은 헛된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아직 풀무 불을 통과하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행동하는 신앙만이 영원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청년의 신앙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렇다고 필요없으니 대충 살라는 그런 뜻이 결코 아닙니다. 20대에 제대로 은혜를 받아야 하고 제대로 말씀을 배워서 좋은 원석이 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 내가 믿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고난의 시기를 지나가면서 흔들리고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 지식과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행동해본 것들이고 순종해보았던 것들일 것입니다. 행동하는 신앙만이 고난의 시기를 무사히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 것을 행동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것을 실행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순종하는 삶을 살아보아야 합니다. 순종으로 경험해본 지식만이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젊을 때 ‘순종해본 말씀’만이 고난의 시기를 통과하여 평생 지속될 것입니다.
(계속)
'내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한 삶을 위하여(1) (0) | 2013.06.08 |
---|---|
행동하는 신앙(2) (0) | 2013.06.04 |
목마름에 관하여(2) (0) | 2013.06.03 |
목마름에 관하여(1) (0) | 2013.06.03 |
변화를 만들어내는 삶 (0) | 2013.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