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묵상

Real Friend vs. Fake Friend (1)

등불지기 2013. 8. 6. 23:52

 

 

저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것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페이스북 친구들을 많이 만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제가 감당할 한계가 넘어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소통의 목적으로 시작한 페이스북이 오히려 소통의 한계를 느끼게 만드는 공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에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는데 직접 댓글을 달지는 못하고 간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시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페이스북을 절제할 때가 왔구나 싶었습니다. 물론 저를 잘 알거나 혹은 제 글을 전체적으로 읽고 의도를 파악하는 분들은 그렇지 않지만요..ㅎㅎ 반면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은 좀 더 자유롭습니다. 소통이 목적이 아니라 표현이 목적이니까요..그래서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글을 올리고 곰곰히 친구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페이스북 친구가 진짜 친구일까요? 누가 나의 진짜 친구일까요?

 

 

 

SNS의 장점이 무엇일까요? 친구를 만나기 쉽다는 것입니다. 찾기도 쉽고 맺기도 쉽습니다. 그냥 '친구수락' 버튼을 마우스로 클릭 한 번만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시시콜콜한 일상사와 사진을 올릴 때 적당히 아첨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좋은 댓글을 달아주는 만큼 상대방도 나의 글에 좋은 댓글로서 반응해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는 것만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맺어진 친구가 진정한 친구일까요? 페이스북을 4년 정도 해보니까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약 나의 정성과 노력을 투자하여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런 관계는 철저히 조건적인conditional 관계입니다. 이것은 마치 돈으로 친구를 사는 것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 친구를 얻는 것과 돈으로 친구를 얻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참된 친구로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친구는 내가 하는 만큼 나에게 잘 해주는 그런 조건적인 관계아 아니라 무조건적인 언약의 관계로서 서로 짐을 나눠지는 운명의 끈과 같은 관계입니다. SNS에서 만난 친구는 내가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칭찬해주고 아부하는 만큼 유지되는 그런 친구입니다. 내가 문제를 만나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것을 자기 문제로 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 친구는 운명의 끈으로 서로 묶여져 있는 한 몸과 같기 때문에 상대방이 잘 되면 그것이 나의 잘 됨이고, 상대방이 겪는 문제는 곧 나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게 있는 참된 친구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페이스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참 친구보다 페이스북 밖에서 발견할 수 있는 친구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참 친구는 내 평생 함께 하는 삶의 동반자입니다. 대표적인 친구가 제 아내가 되겠지요. 어쩌면 제 딸들이 제게 친구가 되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잘 나가나 못 나가가나 변함없이 함께 하고 서로 기도하며 응원해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들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친구들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친구는 반드시 나와 비슷해야만 하는 법은 없습니다. 제가 목사라고 반드시 목사친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라고 선교사친구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와 생김새도, 성격도, 은사도 정 반대인 친구도 있어야 합니다. 제가 가장 어려울 때 제게 힘을 주었던 친구는 고3때부터 한 책상을 쓰며 공부했던 친구였는데 하나님을 믿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이 다 저와 달랐습니다. 저는 그 친구만 생각하면 항상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참된 친구는 내가 잘 나갈 때 만나지 않습니다. 참된 친구는 내가 가장 힘들 때 만나게 되고 얻게 됩니다. 페이스북에서 참된 친구를 발견하기란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어쩌면 하늘의 별따기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장 어두운 시련의 터널을 지나갈 때에도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얼마나 있습니까? 그들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참 친구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압니다. 내가 웃을 때 내 속사람이 흘리는 눈물을 볼 줄 압니다. 가짜 친구는 내가 웃는 모습만 보고 실제로 내가 행복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진짜 친구는 나의 내면을 읽을 줄 압니다.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서 맺은 친구관계가 결코 참된 친구가 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나의 속사람이 흘리는 눈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페이스북을 4년 정도 하면서 페친을 많이 두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도 5백명 가까이 되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페친 수가 5천명이나 된다고 자랑하는 친구 목사님을 보면서 솔직히 부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왜냐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 모든 페친들이 그 친구 목사님의 가슴 속에 얼마나 남게 될까요? 가슴에 오랫 동안 기억이 되고 새겨지는 그런 친구의 숫자를 놓고 보면 제가 그 친구 목사님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ㅎㅎ

 

 

 

참된 친구는 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망할 수 있습니다. 판단하는 것과 책망하는 것은 다릅니다. 판단은 뒤에서 말하는 것이고, 책망은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는데 댓글에 자기 생각을 올리지 않고 자신의 담벼락에 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페북 친구로 맺어졌는데도 말입니다. 예전에 제가 몇 분 목사님과 교수님 글에 반대하고 비평하는 글을 댓글로 올린 적이 있었는데 금방 관계가 이상해지더군요. 이것이 SNS의 한계입니다. 직접 댓글을 달면서 비판을 하면 원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로 함께 동고동락한 것도 아니고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페이스북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는 것은 헛된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참 친구는 결코 내 등 뒤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의 약점도 나의 허물도 잘 알지만 그것을 덮어줄 줄 압니다.

 

 

 

하지만 페이스북 친구라도 친구는 친구입니다. 가짜 친구라도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다들 사랑받기에 합당한 고귀한 영혼들입니다. 그래서 페이스북을 단번에 탈퇴해버릴까 하다가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소중히 여길 것은 여겨야 하겠지요..누가 알겠습니까? 훗날 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본 페친 중에 누군가 저의 평생 동역자가 되어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섬기게 될 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미워하여 보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별볼일 없는 관계가 나중에 다이아몬드처럼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과 아부를 잘 분별해야겠습니다. 칭찬은 참된 친구가 되기 위해 꼭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칭찬은 나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보물을 깎고 다듬어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칭찬은 사람을 연단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아부, 혹은 아첨은 내 안에 있는 나만의 원석을 보지 못합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보석만을 보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밖으로 드러난 보석의 광채에 박수를 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감추어진 원석을 발견하게 도와주고 그것을 깍아서 다듬어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칭찬은 책망과 같은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참 친구는 언제나 나에게 편하지만 않고 항상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한국을 방문할 때 만나는 한 친구는 밤을 새면서까지 제 앞에서 교회의 타락상, 목사의 부패, 설교의 문제 등을 제 앞에서 쏟아냅니다. 그런데 저는 신기하게도 그 친구가 좋습니다. 그 친구는 목사도 아니고 교회의 안수집사이지만 자신의 관점에서 목사와 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에 대해 성토를 하며 제 앞에 쏟아내는데 그럴 때마다 제 마음은 찔리고 아프고 미안하지만 그 친구로 인해서 제가 살아있는 듯 합니다. 몇 시간이고 들어주는 저를 그 친구 역시나 좋아합니다. 항상 편한 친구만 찾지 마십시오. 내 마음을 헤집어놓는 그런 친구도 멋진 친구입니다.

 

 

 

그런 면에서 참 친구는 정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지 못하면 결코 참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솔직하게 나의 단점을 지적해주는 친구, 자신이 나에 대해 보고 느끼는 것에 대해 정직하게 드러내보여주는 그런 친구..저는 그런 친구가 참 좋습니다. 이상하지요? 불편하고 힘들 것 같은데 오히려 함께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해집니다..항상 좋은 말만 해주기 때문에 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인데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집니다..

 

 

 

새벽까지 이야기를 쏟아내는데도 끝까지 들어주는 친구..시시콜콜한 이야기에도 지루해하지 않고 경청해주는 그런 친구..몇 년 만에 만났는데 항상 그 이야기에 그 주제인데도 질리지 않고 들어주는 그런 친구..참 좋은 친구죠?

 

 

 

사촌이 밭을 사면 배아프다는 속담이 있지요? 하지만 참 친구는 내가 잘 될 때 진정으로 기뻐해주고 나의 실패와 넘어짐을 진심으로 슬퍼해주며 나의 실수를 슬쩍 눈감아줄 줄 압니다. 마음으로 나의 성공을 기뻐해주고 마음으로 나의 실패를 슬퍼해주는 친구가 참 친구입니다..

 

 

 

누구나 참 친구를 열망합니다. 누구나 참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참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내 수준이 곧 친구의 수준입니다. 사울을 피해 광야를 다니면서 도망다니던 다윗에게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버리고 도망갔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 다윗에게 찾아가서 그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자처하였던 까달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수준이 다윗의 동역자를 결정한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 좋은 친구를 보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 좋은 친구가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친구는 내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때 얻는 것입니다. 누군가 거짓된 친구는 그림자라고 말했듯이 항상 내가 밝은 순간에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은 참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내가 어두운 고난의 터널로 들어갈 때 그들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고 긴 고난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때에도 내 곁에 머물러 있어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계속)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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