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변증설교(13)-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등불지기 2012. 2. 19. 20:15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본문: 빌1:7

 

금까지 저는 변증설교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변증설교는 복음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구도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변증설교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합니다. 또한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변증설교는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믿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무장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공격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응수하고 있습니까? 변증설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공격받을 때에도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도록 도와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복음을 변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인지 교회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교인들은 세상에서 복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증설교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지 진술하는 데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증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진보를 가져다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는 가운데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복음을 변명하는 것과 확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중요한 사역 중에 하나가 바로 변증설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변증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요? 세 가지 정도의 변증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접촉점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전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이란 곳에 머물다가 수많은 우상들을 보면서 복음을 전할 접촉점을 찾아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을 향해 “종교성이 많다”는 말로 시작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전하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과 문화 속에서 복음의 접촉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의 변증방법은 그들이 던지는 질문들을 가지고 차근차근 답변해나가면서 복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종종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라는 식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들의 대부분은 진리에 대해 탐구하는 마음,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독선적이고 고집이 센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그러나 평소에 그런 상황을 그려보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지 준비를 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오히려 이때다 싶어 반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도전만 받으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공격적인 세상을 향해 오히려 응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 변증의 방법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것인데 복음의 탁월함에 대해서 웅변적으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어떤 종교도 아닌 기독교를 굳이 믿는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까?” “다른 종교지도자들도 많은데 왜 하필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특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가장 고귀한 지식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고상한 지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7,8)

예수 그리스도께서 탁월하신 분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어떤 것을 근거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까? 이에 대해서 우리가 명확하게 대답할 줄 모르면 세상의 공격 앞에 우리는 말문이 막히고 말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비난 앞에 움츠러들어서 다원주의 이론에 몸을 숨깁니다. 다원주의란 어떤 하나의 사고방식을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철학적 가정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가든 다원주의는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선교를 반대합니다. 왜냐면 기독교 선교가 편협하고 고집이 센 행동으로서 다른 문화를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원주의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국가라고 일컫는 미국조차 인구 3분의 2가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성경을 믿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절반 이상이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원주의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는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근거로 말하면 결코 효과적으로 복음을 변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세 번째 방법으로 복음을 변증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말해야 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철저하게 성경의 권위에 의지해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변증해야 합니다. 복음전도자는 이 공식을 의지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진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절) 여기서 우리는 “내 말이 곧 진리다”라는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곧 진리 자체로 주장하셨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너희들은 왜 그렇게도 독선적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성경이 말한다. “내가 곧 진리다”라고. 내가 곧 진리란 말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심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화법은 마치 하나님처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에 두 가지로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코웃음치는 사람들과 진지하고 심각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반응한다고 해도 놀랄 일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갖는 특징들을 정리해봅시다. 아지스 퍼난도란 분은 10가지 특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지만 단순하다.(요7:46) 둘째, 예수님은 매우 권세 있게 말씀하신다.(마28:18;마24:35;마7:28,29) 셋째, 예수님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신다.(막2:10) 넷째,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에게 전적인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하신다.(마10:37,38) 어느 종교지도자도 이렇게 과격하게 헌신과 추종을 요구한 적이 없다. 있다면 사이비 교주들이다. 다섯째, 예수님은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해 사용된 호칭들을 스스로에 대해 사용하신다.(요8:12; 10:11) 여섯째,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만이 받으실 수 있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신다.(요5:22,23) 일곱째, 예수님은 하나님과 유일한 부자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신다. 여덟째, 예수님은 인류의 심판자라고 주장하신다.(요5:27) 아홉째, 예수님은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다.(요5:21; 14:27; 15:11) 열째, 예수님을 반대하던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주장들이 함축하는 바를 잘 알았다.(요5:17,18)

이렇게 엄청난 주장에 대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배척하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랐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친히 하신 말씀을 믿을 만한 것으로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흠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행하신 기적을 통해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탁월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한 메시지,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었습니다. 이 복음은 완전한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배타적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탁월함이 배타성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내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 길, 유일한 길”이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이 죽으심으로 길이 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성취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절대악과 절대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사용하셨습니다. 죽음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전체 3분의 1, 누가복음은 4분의 1을 차지하고 요한복음은 거의 2분의 1을 그리스도의 마지막 한 주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성취한 것을 6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대속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위해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벧전2:24; 3:18절 참조) 역사상에 어느 누가 인류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대신 형벌을 받은 위인이 있었습니까? 둘째, 죄사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은 우리의 죄가 탕감을 받게 되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셋째, 화해입니다. 십자가는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을 화목시켜줍니다. 구약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 죄없는 동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화목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넷째, 구속입니다. 구속이란 값을 주고 시장에서 노예를 사는 행위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 죄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신 사건이며, 우리가 죄와 사망과 사단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음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다섯째, 칭의입니다. 단지 용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의를 만들어서 죄인들에게 옷입혀주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의의 길을 연 것입니다. 여섯째, 회복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범죄하기 전 아담이 가졌던 그 모든 특권과 권세를 다시 되찾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봅니까? 자기 힘과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구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인생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단번에 성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하여 무슨 일을 해주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된 소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로 소개하는 말씀을 하셨고, 자신이 친히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길을 내셨고, 자신이 친히 내신 길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도록 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느 지도자가 생명을 약속했습니까? 자신이 곧 생명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인류역사상 있었습니까? 생명을 약속하는 지도자를 정치나 종교계에서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생명을 주시는 데 있습니다.(요10:10절 참조)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으로 인해 생겨난 열매요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와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언약관계가 필수적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여기서 아는 것은 남녀가 동침하는 것처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통해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선한 목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분의 지도를 따르기로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지도자들과 왕들과 대통령들이 있어서 백성들의 신임과 존경을 얻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위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개인적이고 친밀한 방식으로 자신을 돌보며 지키며 인도하는 사람입니까? 저는 대중적인 스타가 아니라 저를 가장 잘 알며, 가장 잘 돌보며, 가장 잘 지키며, 가장 잘 인도할 ‘목자’에게 내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 그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어느 지도자가 그런 식으로 말을 했습니까? 저는 두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단 한 번이라도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또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갈망을 채워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저는 그 약속을 믿습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만족이며 배부름이십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으며 지금도 살아계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탁월하심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회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영광중에 곧 오실 것입니다. 저는 그분이 다시 오실 것에 제 모든 생애를 걸었습니다. 저는 저의 선택에 반드시 보상이 뒤따를 것이라고 믿습니다. 베스도가 바울에게 소리쳤듯이 누가 나를 미쳤다고 큰 소리로 비웃을지라도 저는 웃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오시는 그날에는 더 크게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부하던 자들은 크게 통곡하며 땅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자랑합니다. 그분은 나의 첫사랑이십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복음설교를 통해 알게 된 그분은 지금도 제게 실제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저에게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분은 죽음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심으로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놓으신 분입니다. 그 길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은 나에게 흘러들어오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을 친히 만드신 분께서 참담하고 비참한 곤경에 빠져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생들을 위해 완전한 길을 제시하셨고, 실제로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제 진리는 온 세상에 선포되었고, 길을 활짝 열려 있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입니다. 그 길로 가느냐, 마느냐입니다. 그 선택은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