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과 삶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종말과 삶에 대해 묵상해보았습니다.
Living in the last days..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가리켜 말세last days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말세의 징조들에 관해 예수님께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징조를 설명해주시기 전에 이 말씀부터 먼저 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24:4) 징조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혹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미혹을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정도를 벗어나는 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영적 중용’을 잘 지키는 일입니다.
Do not be afraid of these things..
두 번 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요동하지 말라’ ‘흔들리지 말라’ ‘걱정 근심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징조들sign은 ‘그리스도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 ‘난리와 난리 소문’ ‘전쟁의 소문’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재난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언제 어떤 일이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시대, 불확실성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크고 작은 뉴스에 요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저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가 임박했음을 알고 우리 마음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Stand firm to the end..
세 번 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끝까지 견디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견고하게 서라’ ‘끝까지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관해 인내하며 무엇에 대해 서라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 직전에 주신 말씀을 보면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 사람들은 점점 냉담해지고 이기적으로 되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견고하게 서야 할 것, 우리가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할 것은 그러한 시대정신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쉬운 시대 속에서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불법이 자행되는 시대 속에서 불법을 참는 것, 바로 그것이 견고하게 서는 삶, 인내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24:12,13
When you become anxious about your future..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뒤바뀔 수 있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내일을 생각하면 걱정과 불안에 쉽게 포로가 되기 쉬울 정도로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내일 일에 대한 염려가 찾아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우리를 위해 최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께 착 붙어서 오늘 하루 동안 최선을 다하여 동행하는 것뿐입니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길은 오늘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잠23:18;렘29:11;마6:33,34
Bringing the Gospel to all nations..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마지막 시대는 선교시대입니다. 선교가 완성되는 날이 역사가 끝나는 날이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징조를 살피며 때를 계산하려고 함으로써 시간낭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상한 음모론에 빠져서 시간낭비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프리메이슨이 어떻고, 세계정부가 어떻고, 중동전쟁이 어떻고, 베리칩과 짐승이 표가 어떻고, 등등 이딴 이야기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십시오. 모든 음모론과 가설과 이론에 콧방귀를 뀌십시오. 그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집중해야 할 본질에 눈을 돌리지 못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중해야할 일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도록 하는 일에 어떻게든 기여하는 것입니다.
verichip?
아프리카에 살다보니 정보도 느리고 교계상황도 잘 알지 못한데요.. 어느날 미국을 갔다오신 어떤 교민과 잠시 대화를 했는데 요즘 미국은 베리칩 문제로 교계가 양분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 한국에서 오신 어떤 교민의 말을 들으니 한국도 비슷하다고 하네요. 이런 저런 말로 자세히 반박할 수 있지만 이 한 마디 하고 싶네요.. 베리칩? 차라리 감자칩이나 먹고 제발 정신 차리세요!! 개가 짖어대도 기차는 달릴 뿐입니다!! 베리칩은 짐승의 표이고, 따라서 만일 베리칩을 받으면 우리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서도 없는 것이고 사도들이 전하여준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9,0)
back to Jerusalem?
복음이 중동국가를 넘어 서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세상의 끝이 온다는 주장은 1920년대 중국교회에서 나오기 시작했는데요.. 이것을 선교비전이라고 외치는 몇몇 정신나간 사람들과 교회들이 있습니다. 아주 위험하고 무책임한 선동인데요..현재 이스라엘도 선교지중에 하나이고 그곳에서 사역하시는 분들을 존중하지만 예루살렘 지역이 최후의 선교지, 최후의 영적 결전지라는 발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부터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지 언제 예루살렘까지 다시 되돌아오라고 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복음화해야 주님이 오신다고 언제 가르쳤습니까? 1920년대 이전까지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론과 구호를 성경적이라고 믿는 그 믿음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마24:14
신사도운동?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
아프리카에 있다 보니 한국교회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요즘 신사도운동에 관해 큰 이슈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대충 들으니 일종의 은사주의 운동입니다. 무론 아프리카에도 은사주의 운동이 있지만 한국과는 약간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이럴 때 많은 가련한 양떼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체험이나 은사를 강조한다고 나쁘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틀렸다고 정죄하지 않다록 조심해야 합니다. 교리적인 논쟁은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지 교회를 분열시키는데 일조하면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분별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 균형balance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성령의 열매도 강조되어야 합니다. 특히 은사의 분별기준은 열매입니다. 거짓선지자는 은사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로 분별해야 합니다. 은사 없는 열매는 유약하고, 열매 없는 은사는 위험합니다. 교리와 실천적인 사랑 역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교리논쟁에 치중하다보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하다가 이단과 사이비도 용납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숙함은 이러한 균형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성장growth과 성숙maturity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단계로 나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린아이의 단계에서는 체험도 있고 환상도 있고 은사도 나타납니다. 어른의 단계에서는 사라진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체험과 은사는 여전히 나타나지만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고, ‘나의 경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은사가 풍성한 고린도교회를 가리켜서 아직도 어린아이의 단계에 머물러 있어 젖만 먹고 단단한 음식은 먹지 못한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와 체험 자체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 째 편지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낙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14년 동안이나 그 놀라운 체험을 감추어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천국과 지옥 간증하기 위해 교회를 돌아다니는 일과 얼마나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까? 은사와 체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기초foundation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말씀의 기초에 굳게 서야 합니다. 복음의 원수는 어떻게든 이 기초를 흔들려고 하고 있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도록 유혹하며 흔들고 있습니다. 누구나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초를 확인하면서 마치 오뚜기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한 때 백투 예루살렘 사상을 신봉하던 적이 잠시나마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묵상하면서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는가,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쳤는가를 묵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과 사도들이 전하여준 기초를 토대로 다른 가르침들을 비교해보아야 하고 조금이라도 치우쳤다면 그 치우침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만드는 세력들이 워낙 많은 시대에 살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다시금 기초 작업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사도들의 표적에 속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
기적과 기사에 관한 이슈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택하신 자들도’ 미혹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이 점점 말씀보다는 신비한 체험과 은사를 강조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강해설교보다는 천국과 지옥 간증이야기가 더 인기를 끌 것입니다. 성경공부보다는 입신과 넘어뜨림이 더 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영적권위를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비록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큰 기적을 행하여 보여줄지라도 조심하십시오.
재림의 때를 알 수 있다고?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예수님의 재림시기를 계산할 수 있다거나 혹은 추측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모두 우리를 미혹하게 하려는 원수의 장난입니다. 모두 우리가 달리는 길을 멈추고 곁길로 빠지게 만드는 원수의 수작입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전도와 선교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재림의 때를 알 수 있다는 이야기나, 베리칩에 관련된 음모론 등의 이야기는 모두 전도와 선교를 약화시킵니다. 거짓 사도나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기존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참된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대상은 잃어버린 영혼들과 족속들입니다.
미혹하는 자들의 심리
미혹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도 미혹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철저히 진리를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조금도 거짓을 말하거나 미혹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혹하게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미혹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미혹의 영은 완벽하게 미혹하게 하는 자들과 미혹을 당하는 자들을 속입니다. 미혹하게 한 자들이나 미혹을 당한 자들이나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날에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성경의 권위 아래 복종하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대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
사도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권면할 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도래할 것이라고 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5~17) 체험도 필요하고 은사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성경의 권위 아래 복종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사역자에게 있어 성령의 역사와 성경의 권위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성경의 권위 아래 성령의 역사가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을 한다면 우리의 체험이나 우리의 은사를 전파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처럼 많은 은사와 체험을 한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만을 외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성경의 권위 아래 자신을 두시지 않으셨습니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라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은사 중심으로 목회하는 분들의 교회를 보면 말씀의 권위가 있어보이나 사실 말씀의 권위가 약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목회일선에서 물러나면 그들이 섬긴 교회는 십중팔구 분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중요하지만 성경의 권위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목회자는 가르치는 사역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 뿐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을 키워내는 사역을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역자는 내가 없어도 될 정도로 나와 같은 사역자를 키워내어야 합니다. 은사중심의 목회는 말씀중심의 목회보다 힘든데 왜냐면 나와 같은 체험, 나와 같은 은사를 가진 사역자를 키워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이 큰 구원을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2:3)
모든 이단과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하여준 구원을 희석시키거나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은 영생파의 구원관입니다. 그 주장에 의하면 울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울어보지 않았으면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전에 울어보았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울어야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한국의 신사도운동을 주도하는 어떤 사람은 회개를 강조합니다. 물론 회개 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에 대한 강조가 사도들이 가르친 것과 다릅니다. 회개에 대하여 잘못 혹은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회개의 본질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개와 회심을 구분한다든지, 혹은 죄 자백이라는 특정한 행위를 강조하는 구원파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회개하는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5~7)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9,10)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예수님과 사도들은 우리가 회개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즉 구원의 조건으로 회개를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회개를 말씀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최초로 복음을 선포하실 때 하신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에도 회개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회개는 복음을 믿는다면 당연히 따라와야 하는 열매와 같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볼까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음행중에 잡힌 여자에게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회개를 조건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 여인을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요8:11) 또 다른 예를 볼까요? 예수님께서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각각 말씀하실 때 회개를 강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회개를 강조하셨지만 한번도 구원의 조건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은 믿는 자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구원받았어도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받은 구원도 취소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또 취소하시는 분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업느니라. 그들을 주신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이와같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을 우리의 행위를 따라 취소하실 수도 있는 하나님으로 말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는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히6:4~8) 이 본문에서도 회개와 구원을 결부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즉,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것을 구원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문제를 구원의 문제와 결부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이단과 거짓 사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사도들이 전해준 구원관을 파괴합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받은 구원을 잘 간직하며, 항상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한다면 당연히 내 삶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들이 나타나야 정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자고 하면서 회개를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회개해야만 구원을 받는다거나 회개하지 않으면 받은 구원이 취소된다고 하는 가르침은 사도들이 전하여준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자의 삶
천년왕국 이론에는 전천년설, 후천녀설, 그리고 무천년설이 있습니다. 천년왕국에 관한 저의 입장은 무천년설입니다. 어릴 적 신앙생활 할 때에는 전천년설을 믿었으나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하면서 이제는 확고하게 무천년설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묵상할수록 무천년설이 훨씬 더 복음적이고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 전천년설을 믿었듯이 지금 전천년설을 믿고 주장하는 분들을 볼 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넓게 보고 복음을 깊게 보면 분명히 관점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확립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천년왕국은 확고하다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왕같은 제사장이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으며, 믿음으로 부활에 참여하고 있으며,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받아서 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향하여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조소를 날릴 수 있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이길 수 있다”고 고백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이긴 증거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승리에 믿음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자꾸만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실패의식과 패배의식 속에 잠겨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일예배는 항상 회개해야만 하는 자리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주일예배는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있고, 영원히 살아 잇는 자들입니다. 다시는 사망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핍박과 고난이 우리 삶속에 끊이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이미 승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선한 목자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것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가 권세 있는 자처럼 살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