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감사는 하나님을 감동시킨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과 자비하심 뿐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내 삶을 드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부족한 저와 저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주시는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어제는 추수감사주일인지라 주일설교는 눅17:11-19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생활]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참된 감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23) 만약 하나님께서 내 삶속에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경험하려면 먼저 참된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되는 은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leprosy 한센병) 10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서부터 외치기 시작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Jesus, Master, have pity on us!! 그들은 살이 썩어 문들어지는 아주 몹쓸 병에 걸린 자들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차단당하고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을 향한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온 몸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일지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부디 불쌍히 여겨달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신 예수님은 "가서 제자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몸은 깨끗하게 될지어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몸쓸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가족과 격리되어 살아야 하는데 만일 낫게 되었다면 제사장이 그 몸을 진찰하고 이젠 괜찮다고 선언을 해야만 사랑하는 가족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던 가족과 형제들에게 돌려보내기 위해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긍휼하심에 의지할 때 그분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순종의 보상으로 받은 치유의 은혜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제사장들에게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몸은 여전히 몹쓸 피부병으로 뒤덮인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전부를 맡기고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기로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도중에 그들의 몸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백성이 건넌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으로 전진할 때 홍해가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요단강 물이 마르고 언약궤를 맨 제사장이 강을 건넌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발이 요단강 속으로 잠글 때 요단강물이 흐르는 것이 멈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치유는 이처럼 대담한 순종의 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보고 환희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다들 더 빠른 걸음으로, 아니 제사장을 만나기 위해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은 뛰다가 발걸음을 되돌립니다. 사마리아인인 그는 돌아가서 자신을 치유하신 주신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렸습니다.
치유받은 9명은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7-19)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왜 다른 9명은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돌아온 1명은 이방인이고, 다른 9명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정결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는 판정을 받고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는 일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을 돌아오지 못하게 만든 것은 그들 마음을 붙잡고 있었던 율법주의였습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9명의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선물이 더 중요했습니다. 또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유대인들은 어릴적부터 메시아와 선지자의 기적이야기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은 메시아로서 혹은 선지자로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운 일이지만 동시에 "당연한 일"이였습니다.
참 감사의 비결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중단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감사하기 위해 '조건들'을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허비합니다. 감사할 조건이 없기 때문에 감사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생각속에 "당연"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참 감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생각지 못합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아내나 남편, 자녀들의 존재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의 환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참된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9명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기적은 그들이 간절히 긍휼을 부르짖은 결과요, 그들이 순종의 발걸음을 내디딘 보상으로 그리고 메시아로서 행하는 '당연'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이 예수님께 돌아가는 것보다 중요했고, 선물을 주신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의 선물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와서 엎드려 감사드렸던 사마리아인에게는 그를 사로잡는 정결의식도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도 당연하다는 사고방식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놀라운 은혜가 그에게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 중에서
거칠고 험한 태평양 바다를 수 개월 항해한 끝에 도착한 조선 땅에서 온갖 고난과 악재를 견디며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 중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가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던 비결을 보여주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걸을 수만 있다면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설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귀로 들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말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지금 누군가는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살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지금 누군가는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자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한 내 삶에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삶. 내 인생. 나!!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난 행복한 사람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감사하기
"...그(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참 감사는 감사할 만한 조건들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감사는 감사할 조건이 없는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조건이 없는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게 만드는 능력있는 감사, 참 감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리스도인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는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 때문이 아니라 모든 복을 베푸신 하나님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도, 이유도 보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참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순간입니다.
2014년 추수감사주일에...
추수감사주일은 1620년 영국 국교도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102명의 청교도Puritan가 메이 플라워May Flower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 플리머스로 건너간 일로부터 유래합니다. 9월에 항해를 시작하여 11월에 도착한 그들은 매서운 추위와 굶주림에 절반이 죽어나가는 고통을 겪으면서 신앙의 회의가 일어났을 때 그래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다시 붙들고 감사함으로 극복하고 승리하였습니다. 이듬해 봄에 그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씨를 뿌리기 시작했고 그해 11월에 그들은 추수하여 원주민들을 초청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초대대통령은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1904년 선교사들이 한국에 발을 내디딘 날을 기념하여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했습니다. 요즘은 추수감사주일을 추석에 맞추어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역사를 통해 본 추수감사주일의 정신이 곡식을 추수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견디며 신앙의 자유를 지키고 복음을 전했던 신앙의 선배들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100여전 전에 조선 선교부에서 결의한 11월 셋째 주일에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환난과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영광을 돌렸던 믿음의 선배들의 감사를 본받기 원하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김광락 선교사 올림..
P.S.
오랜 만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네요..
아프리카의 따가운 햇살에 시력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귀찮다고 쓰지 않은 썬글라스를 가까이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흑인목회자훈련학교는 내년 초까지 방학에 들어갑니다.
어제 추수감사주일예배에 세례식과 성찬식을 인도하였습니다.
사역의 보람은 말씀으로 영혼이 거듭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여러 증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때 가장 큰 것 같습니다.
저희는 날마다 놀라운 은혜와 기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해주시는 모든 등불가족 여러분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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