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싸움
재정싸움이란 무엇일까요? 내 삶의 주인이 재정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삶속에서 증명해보이기 위해 벌이는 믿음의 몸부림을 말합니다. 이 재정싸움은 현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경험하는 영적전투입니다.
“돈이 없어서 못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6:24)
내가 평소 생각 없이 하는 말 속에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노라고 입술로 고백은 하지만 정작 손과 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증명해볼까요? 예를 들어, 교회에서 실시하는 단기선교프로그램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가정해볼까요?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교회에서 실시하는 단기선교여행에 꼭 참석하고 싶지만 형편이 못되어 어렵네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돈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할지 말지 결정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은행 잔고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돈이 주인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일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결코 ‘돈이 없어서 못합니다.’ 혹은 ‘돈이 있기 때문에 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대신 ‘비록 돈이 없어도 하나님의 뜻이므로 합니다.’ 혹은 ‘돈이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못합니다.’라고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평소 하는 말 속에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우니까 아끼면서 살아야죠.”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11:25)
얼마 전 저는 미국의 큰 침례교단에서 파송선교사 수 백 명을 재정적인 이유로 해고할 것이라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워질 때 선교사는 정리될 일 순위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불황recession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빚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고 삶의 질은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이 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우니까 조금이라도 아껴야지요.” 예, 맞습니다. 절약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그리고 바람직한 습관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평범하게 들리는 이 말 속에 불신앙이 도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진리가 반드시 성경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절약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끼면서 사는 것과 인색하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절약하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믿음의 후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끼는 것이 도리어 빈곤의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북한이 석탄과 석유를 아끼기 위해 산과 들의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후퇴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어려울수록 더 많이 뿌리고 심어야 합니다. 어려울 때 절약하는 것이 똑똑한 것 같지만 실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똑똑함과 지혜로움의 차이-우리는 그 둘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끼면서 살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후하신generous 성품에 반대로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방탕하며 펑펑 낭비하는 것과 너그럽게 사는 것을 예리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둘은 정말 서로 구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곧 지혜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이 지혜가 있다면 우리는 재정싸움에서 능히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적 부요함과 영적 부요함의 차이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요한계시록을 보면 극심한 가난 속에서 고난당하던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우리 예수님은 ‘가장 부요한’ 교회yet you are rich라고 말씀하셨고(계2:9), 반대로 부자들이 많이 출석하며 헌금이 넘쳐나서 예산이 남아도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3:17).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영적으로 부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세상적으로 풍요롭게 살수록 영적으로는 빈곤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천 년 교회사가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일수록 교회는 영성이 어두워져 갔습니다. 따라서 세상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풍요로움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세상적으로 풍요롭지 못하다고 위축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세상적으로 풍요롭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풍요를 의지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영적인 풍요로움이란 하나님의 부요함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부요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물질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반면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누리며 삽니다.
그리스도인의 풍요로움에 대한 새로운 정의
‘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제가 정의하는 ‘그리스도인의 풍요로운 삶’이란 눈에 보이는 물질이 없어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할 줄 알고 베풀 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때론 멸시와 천대를 받을지라도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는 것, 물질적 빈곤 속에서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와 긍휼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물질적 빈곤이 우리의 감정과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하심에 믿음으로 접속되어 살아가는 줄로 여기고 하나님의 넉넉하심, 너그러우심, 은혜로우심이란 성품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진정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많은 물질을 쌓아두었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우며 쪼들리는, 그래서 푼돈을 아끼면서 살아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후하게 베풀고 아끼지 않고 줄 줄 알며,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기꺼이 섬길 줄 아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재물이 없어도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한 감격으로 주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많은 부흥사들이 헌금을 강조할 때 인용하는 이 성경구절은 헌금을 가르치는 문맥이 아니라 어떤 태도와 성품을 가지고 대인관계를 할 것인가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문맥을 무시하고 단지 돈이나 물질에 국한하여 적용하는 것은 억지스럽고 무리가 있습니다. 이 문맥을 무시하게 되면 나는 ‘주었는데’ 왜 넘치게 받지 못하느냐며 원망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어떤 기준과 잣대와 태도를 가지고 대하느냐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후하게 대접해주기를 원하신다면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후하게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인색한 태도를 유지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인색한 태도로 대하실 것입니다. 관계와 성품에 관한 하나님의 원칙principles을 이해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성경말씀을 나의 재정상황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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